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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백세 건강 유지

"손님을 왕처럼 모시겠단 初心, 3주만에 무너졌다"

손님을 왕처럼 모시겠단 初心, 3주만에 무너졌다"

  • 원선우 기자

    입력 : 2013.03.04 03:01

    [현광호 前대전현충원장, 1년간의 택시기사 경험 블로그 일기로 적어]

    64세에 택시 핸들 잡다
    어떤 어려움도 참겠다고 결심…12시간 운전보다 힘든 건 '사람'

    분노와 기쁨과 눈물…
    주폭과 씨름, 안하무인 손님…'먹이' 찾아 헤매는 들짐승 가득한
    정글같은 서울의 밤이지만 새벽일 젊은이 보며 마음 다잡아

    13개월간 내가 배운 것은
    팍팍하고 숨 돌릴 틈 없는 인생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2000년 국립대전현충원장 재직 시절의 현광호 전 원장(오른쪽). /현광호 전 현충원장 블로그

    "오랜 생각 끝에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출발하는 첫날이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대장정이다. 그 어떤 고난도 참으리라."

    지난해 1월 13일 현광호(65) 전 국립대전현충원장이 정년 퇴임 후 택시기사로 첫 출근을 하는 날 자신의 블로그 '眞浩(진호·현 전 원장의 별호)의 日記(일기)'에 올린 글이다. 현 전 원장은 이후 13개월 동안 하루 12시간씩 택시 기사로 일했다. 1970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던 그는 1977년 공무원으로 전직, 국립대전현충원장·국방전산정보원장 등을 역임하고 2008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13개월 동안 하루 20여명씩, 손님 6000여명을 실었다. 사납금과 기름 값을 뺀 한 달 벌이 약 130만원, 돈벌이가 안 좋을 때는 100만원도 채 못 벌었다. 그는 13개월간 매일같이 블로그에 일기를 썼다.

    전직 고위 공무원이 운전대를 잡고 들여다본 세상은 어땠을까. 그의 블로그엔 서민들의 삶과 애환, 우리 사회에 대한 감동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오늘 손님을 왕처럼 모시겠다는 초심이 마침내 허물어져 버렸다. 관세청 쪽에 가는 손님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굽실굽실하며 매우 저자세로 표현했지만, 이러다간 열통 터져 내 명대로 못 살 것 같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은 지 3주일쯤 지난 2012년 2월 2일, 현 전 원장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한 블록 더 갔다고 입에 담기 힘든 막말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열 받아 함께 욕을 하며 싸웠다"며 "날 택시 기사라고 얕잡아 보는 것 같아 더 흥분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11월 인천국제공항 택시 대기장에서 몰던 택시 뒤에 선 현광호 전 원장. 이날 팁을 포함, 6만원에 일본인 손님을 인천공항에 태워다 준 현 전 원장은 다시 공항에서 손님을 태우려고 6시간을 기다렸다. /현광호 전 현충원장 블로그
    2012년 2월 22일엔 그는 세상을 '동물의 세계'라고 했다.

    "택시는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굶주린 야행성 들짐승과 무엇이 다른가. 얼마나 쏜살같이 먹이를 찾아 달리는지 초보인 나는 전혀 게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내 바로 앞에서 고객을 착착 채 간다. 택시보다 더 적나라한 동물적 세계는 없는 것 같다."

    그의 첫 월급은 64만6156원이었다. 2012년 2월 12일 '급여'란 제목의 글에서 "못된 사람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참아가면서 12시간 동안 열심히 노동하고 친절을 베푼 대가, 회사 영업 차량으로 하루 12시간씩 세상 구경 실컷 하고도 덤으로 얹어준 돈, 무조건 감사다"고 적었다.

    우리 사회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한 경험도 생생했다. "새벽에 수유리에서 젊은이 둘이 탔다. 치킨집에서 낮 2시경부터 밤 3시까지 일을 한단다. 그들은 월곡동의 한 찜질방에 들어갔다. 거기서 자다가 다시 일을 나간다고 한다. 저마다 힘들지 않은 직업이 없다." (2012년 8월 21일)

    "미아동에서 상계동 은빛마을에 간 손님은 가는 동안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혈소판이 부족한 병에 걸려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다며 신세 한탄을 했다. '8만명 중 한 명이 걸리는 병인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치는가? 너무나 예쁜 아들인데'라며 운다. 집에 들어가서는 울지 마세요(라고 위로했다)." (2012년 12월 22일)

    택시 모는 즐거움도 있었다. "보라매병원에서 탑승, 가톨릭대 성의회관을 거쳐 태릉입구역까지 간 의대생 남녀 두 명을 만난 기쁨이 컸다. 목적지는 전남 곡성인데, 150여명의 의대생들이 모여 15일 동안 의료봉사를 한단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힘이 난다."(2012년 7월 21일)

    "이태원에서 캐나다인 2명, 독일인 1명을 태웠다. 상암동의 영화 업체서 일하는 그들의 연봉은 불과 3000만원이라고 했다. '한국서 살기 재밌느냐' 물으니 '재밌다. 독일엔 동대문 같은 야시장이 없다'고 답했다."(2012년 12월 11일)

    "캐나다 토론토 출생 한국인 2세인데 한국말과 중국말을 배우기 위해 왔다고 한다. 구김살 없이 착한 젊은이였고, 한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2013년 2월 9일)

    그가 택시 기사로 일하며 배운 것은 무엇일까. 2012년 12월 30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세상 인심, 사람들 사는 방식을 대충이라도 파악했다. 낭만적으로만 보았던 택시 기사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도 확실히 알았다. 게으름도 없어졌다. 동대문시장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가락동 시장의 바쁜 삶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알아야 할 것은 무궁무진.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 그러나 최선을 다하다가 죽어야 하는 존재. 오늘도 새벽 찬바람 가르며 나는 간다." 지난 2월 12일 현 전 원장은 세 번째 접촉사고를 낸 뒤 사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