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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한한 힘/뇌의 신비

권력자의 뇌 속엔 '사나운 개'가 산다


권력자의 뇌 속엔 '사나운 개'가 산다

  •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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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8.10 03:01

    뇌과학자인 저자, 勝者 머릿속 해부 - 권력 가지면 공격적 호르몬 더 분비
    섹스·도박·술 등 강한 자극 좇게 돼… 승리 맛본 자들 평균보다 오래 살아
    알코올 중독이던 피카소의 아들 등 성공한 집안 자식 중 정서 장애 많아

    승자의 뇌

    이안 로버트슨 지음|이경식 옮김 | RHKㅣ392쪽|1만5000원

    그룹 아바(ABBA)의 노래 '승자가 다 갖는다(The Winner Takes It All)'는 사랑과 인생을 냉정하게 정리한다. 패자는 쓸쓸해지는 게 숙명이고 신(神)은 냉정하며 게임은 계속된다.

    그런데 이 책은 감상은 밀쳐두고 승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승리 또는 권력에 대한 심층 해부다. 이만큼 폭이 넓은 책이 또 있을까. 누구나 권력을 동경하거나, 쥐고 있거나, 놓쳤거나, 혐오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일랜드 뇌과학자이자 신경심리학자. 그는 미 국무부 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를 인용한다. "권력은 가장 큰 최음제다."


    부모의 성공은 자식에겐 저주?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아들 파울로는 평생을 방황하면서 술독에 빠져 있었다. 자신에게 권력을 휘두르며 무시했던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정이 풍비박산 난 뒤에는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비서 겸 운전사로 일했다.

    
	승자의 뇌 표지 사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미술관 게티 센터는 석유 재벌 장 폴 게티 가문의 흔적이다. 장 폴 게티는 아들 폴 게티 주니어와의 불화로도 유명하다. 폴 게티 주니어는 학교를 중퇴해 히피가 됐고 헤로인을 복용했다. 아들이 못마땅했던 장 폴 게티는 손자가 납치돼 협박을 받았을 때 "몸값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집으로 '손자의 잘린 귀'가 배달됐다.

    태어나면서부터 승패가 결정돼 있다면 승자의 자식은 남보다 큰 성공을 거둬야 옳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공한 집안의 자식이 정서 장애를 겪고 약물에 중독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부모가 밖에서 성공하고 풍요로울수록 자식과 보내는 '가치 있는 시간'이 줄어들며 정서적으로 덜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자식의 내적 성취동기를 꺾는다는 성공의 역설(逆說)"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호르몬 때문이야

    권력의 감정 밑에는 테스토스테론이 흐른다. 남녀의 성(性) 충동을 촉진하며 더 공격적으로 만드는 호르몬이다. 조지아주립대 연구팀은 1994년 이탈리아와 브라질의 월드컵 결승전을 전후해 두 팀 응원단의 타액을 채취했다. 경기는 승부차기 끝에 브라질이 이겼는데 호르몬 수치 변화가 놀라웠다. 승리에 들뜬 브라질 팬들은 테스토스테론이 평균 28% 치솟았고 패배한 이탈리아 팬들은 27% 곤두박질 친 것이다.

    
	유형별 권력자의 뇌 설명 그래픽
    동물 사회에도 '승자 효과'가 있다.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과 싸워 이기고 다음 대결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을 높일 경우 위계 체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호르몬이 행동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행동이 호르몬 수치를 바꿔놓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승리가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유발하며 그렇게 승리를 경험한 동물은 덜 불안해지고 더 공격적으로 변하며 고통을 견딜 임계점도 높아진다. 저자는 "상체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길게 뻗는 권력자의 자세는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낮춰 신체와 뇌의 화학적 상태를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권력 쥐었다고 사람이 변하니?"

    변하는 게 정상이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우정에 금이 간 것도 '승자 효과' 때문이었다. 정치적 동지였던 둘은 1999년 코소보 문제로 틀어졌다. 북아일랜드 갈등을 해결한 블레어는 밀로셰비치의 '인종 청소'를 막아야 한다며 강경하고 전투적으로 나섰다. 반면 월남전 당시 병역을 회피했고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던 클린턴은 코소보에 지상군 투입을 꺼렸다. 블레어는 독단적인 권력자였고 '통제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개코원숭이를 들먹이지 않아도 섹스와 권력이 내통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 스트로스 칸 전 IMF 총재의 성 추문이 떠오른다. 블레어도 마초였다. 테스토스테론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수치를 높여주는데, 도파민은 섹스든 도박이든 온갖 전율을 좇는 욕망을 충동질한다. 권력은 중독성 강한 술이나 마약과 같았고, 블레어는 결국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군을 이라크 침공에 투입하며 그 덫에 빠졌다.

    '나를 길들이는 것'이 진짜 승리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은 후보로만 지명됐다 미끄러진 이들보다 평균 4년 더 살았다. "오스카 트로피가 냉혹한 영화계에서 자아에 대한 영속적 통제감, 안전 신호를 줬다"는 해석에 수긍하게 된다. 자아를 보호해야 육체를 지킬 수 있다는 발견이다. 권력욕을 개인의 목적에 집착하는 'P형'과 사회적인 것을 향하는 'S형'으로 구분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버락 오바마는 S형, 조지 W 부시는 P형이며 교사와 간호사는 높은 S형 권력욕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꼼꼼한 사례와 분석, "진정한 승자는 자신의 자아가 '사나운 개'라는 사실을 알고 멀찍이 물러서며 목줄을 단단히 채워둔다"는 결론도 믿음직스럽다. '나를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과제라는 것이다. 원제 'The Winner Eff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