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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고고학)

[만물상] 시안(西安)과 한민족


[만물상] 시안(西安)과 한민족

  • 지해범 논설위원

  • 입력 : 2013.06.22 03:14

    3년 전 중국 속 한국사(史) 흔적을 찾아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 갔다. 황허(黃河) 중류 고대문명 발상지 시안은 주(周)에서 당(唐)까지 열세 개 왕조가 거쳐 간 6000년 고도(古都)이자 실크로드 출발점이다. 당나라 때엔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 진시황릉·병마용·화청지(華淸池)를 비롯한 세계적 유적을 자랑하지만 곳곳에 한민족과 관련된 역사 유적도 품고 있다.


    ▶천복사(薦福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는 8세기 신라 승려 혜초(慧超)가 활동하던 절이다. 혜초는 열여섯 살에 당으로 건너가 시안과 뤄양(洛陽)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인도와 서역을 10년 여행하고 돌아온 뒤에도 시안의 두 절에 머물며 불경을 번역하고 포교했다. 시안 남쪽 흥교사(興敎寺)엔 신라 왕손 출신 원측(圓測)의 사리탑이 있다. 쓰촨 대지진에 탑 일부가 부서졌지만 지금쯤은 수리가 끝났을 것 같다.

    
	만물상 일러스트

    ▶6~10세기 당 수도 장안은 세계 처음으로 인구 100만을 넘어선 국제도시였다. 한국과 일본·버마·중동에서 온 외교관과 상인·유학생·유학승(僧)이 3만을 넘었다고 한다. 신라인 최치원과 김가기는 외국인에게 개방된 과거시험 빈공과에 합격해 관리로 일했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는 안서도호부 총사령관에 올라 실크로드를 평정했다. 신라 유학생 박구는 장안의 바둑 고수들을 모두 누르고 당 희종의 바둑 비서 '기대조(棋待詔)'가 됐다. '1200년 전 이창호'였던 셈이다.

    ▶1940년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은 일본군 추격을 피해 시안 롄후구(蓮湖區)로 사령부를 옮겼다. 스무 명 남짓한 광복군들은 다짐했다. "초(楚)는 단 세 집 남아도 진(秦)을 멸망시킨다 했다. 단군 후손인 우리는 기어코 고국을 다시 찾고 말 것이다." 흥교사에서 멀지 않은 두취진(杜曲鎭)에서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건물은 양식 창고가 돼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한·중 정상회담을 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29~30일 시안을 찾는다. 시안은 시진핑 주석의 '정치적 고향'이다. 중학생 시진핑은 문화혁명 시절 시안에서 250㎞ 떨어진 농촌으로 하방(下放)돼 7년간 토굴에서 고생하며 청년 지도자로 컸다. 교육도시 시안에는 시안교통대를 비롯한 명문이 많다. 중국 서부 대개발 거점도시여서 삼성·LG·SK를 비롯한 우리 기업도 여럿 나가 있다. 1200년 전부터 한반도인과 인연을 맺은 시안에 한국 국가 지도자가 처음 방문한다. 중국인의 마음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는 여정(旅程)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