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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디지털 치매

[만물상] 디지털 치매

  • 박해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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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4.07 22:43

    소설가 이윤기는 우리 가요를 비롯해 100곡 넘는 노래를 외워 불렀다. 영어와 일본어 책 번역으로 생계를 꾸린 작가답게 팝송과 엔카도 자유자재 넘나들었다. '문단 가수' 이윤기의 전성기는 1991년부터 우리 사회에 노래방이 퍼지면서 막을 내렸다. 누구나 노래방에서 다양한 레퍼토리를 부를 줄 알게 됐다. 이윤기는 남달리 가사 외우느라 애썼던 날들을 되돌아보며 억울해했다. "노래방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기억력을 떨어뜨린다"며 혀를 찼다.

    국립국어원이 2004년 '디지털 치매'를 신조어(新造語)로 올렸다.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해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라고 정의했다. 외우는 전화번호가 집과 가족의 휴대전화 번호뿐이라면 일단 디지털 치매로 봐야 한다고 했다. 노래방에서 가사를 보지 않고 부를 노래가 몇 곡 안 되는 것도 디지털 치매의 증상으로 꼽았다.

    ▶미래학자 니컬러스 카는 "인터넷이 사람의 뇌를 얄팍하게 만든다"고 했다. 온라인에 쏟아지는 정보를 슬쩍 훑어보는 '스타카토' 식으로 사람들의 독서 습관이 바뀌었다고 했다. 소설 '전쟁과 평화' 같은 대작을 뚝심 있게 읽어내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얘기였다. 카는 "과거의 내 뇌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했다. 미디어 이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도 디지털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퇴시킨다고 했다. "사람들이 지식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고 컴퓨터에 '상시(常時) 접속' 상태를 유지한 채 그때그때 꺼내 쓰느라 디지털에 얽매인다"고 했다.

    ▶독일 뇌과학자 만프레드 슈피처가 지난해 쓴 책 '디지털 치매'가 국내에 번역됐다. 그는 "디지털 치매는 정보 기술을 주도하는 한국의 의사들이 처음 이름 붙인 질병"이라며 책 제목을 고른 계기를 밝혔다. 한국 초등학생의 12%가 인터넷 중독이라는 통계를 인용하며 독일 청소년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 14~16세 청소년 중에 인터넷 중독자가 4%에 그치지만 자꾸 늘고 있다고 걱정했다.

    ▶슈피처는 학교에서 디지털 교과서로 가르쳐선 안 된다고 했다. 디지털 미디어에 빠지면 종이책 읽는 것보다 뇌 신경세포가 적게 움직여 청소년 뇌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얘기다. 그는 디지털 치매 예방법으로 달리기와 명상, 얼굴을 맞댄 대화를 제안했다. 저명한 뇌과학자가 경계할 사례로 한국인의 디지털 중독을 내세웠다는 게 씁쓸하다. 하긴 우리 사회엔 종이책은 멀리하고 인터넷 가십을 화제로 삼는 어른이 너무 많다. 아이 뇌보다 어른 머릿속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