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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백세 건강 유지

[ESSAY] 100세 사는 세상에 그녀가 늙는 법

[ESSAY] 100세 사는 세상에 그녀가 늙는 법

  • 윤묘희 前 MBC 드라마 '전원일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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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3.12 23:07

    증손자 둔 스포츠센터 '절친' 그녀, 전철역 출구 잘못 나와 허둥대도
    패딩 점퍼에 '마사이 운동화' 신고 열무 한 박스 사러 가락시장까지
    자식들 보듬는 걸 황혼의 낙 여겨… 의연한 '맞춤형 나이 들기' 보여 줘

    윤묘희 前 MBC 드라마 '전원일기' 작가
    그 무릎으로 산소엘 어떻게 올라갔는지, 용기인지 무모함인지 분간이 안 된다. 천리길 친정 부모님 합장제(合葬祭)에 바쁜 아들 대신 참석하고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그녀는 어찌나 소변이 급한지 증손자 기저귀 생각이 간절했다며 깔깔거린다. 수술비 걱정 말고 병원 알아보라는 아들 전화에 갑자기 무릎이 더 아파 지팡이 없이는 꼼짝 못한다고 새삼 엄살이다. 내가 그렇게 권할 때는 스포츠센터에 같이 다니는 동네 노신사에게 창피하다며 '노' 하더니.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노파다. 이런 게 그녀의 매력이기도 하다.

    원로 여가수의 백발에 반해 머리 염색은 접었다고. 그래도 그는 한 달에 한 번은 자신의 몸 관리를 위해 부지런히 미용실에 들른다.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니 의상에도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신세대가 즐겨 입는 패딩 점퍼에 굽 낮은 부츠, 꽤 고가인 그 마사이 운동화는 애완견 데리고 한강 둔치 산책 나갈 때 신는다고 한다.

    각종 공과금을 자동이체했더니 도무지 머리 쓸 일이 없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 해지하고 딴은 매달 꼼꼼하게 계산해서 은행에 가건만 한 번도 딱 맞아떨어진 적이 없다며 그녀는 앰한 부모 원망까지 한다. 냉장고에 넣어뒀다 잊어버려 못 먹고 버리는 음식에, 진찰권 두고 병원 가기, 손에 들려 있는 구둣주걱 보고 놀라 38층 집에 다시 올라가는 일은 항다반사란다.

    언젠가는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그가 전화를 했다. 친척 결혼식에 다녀오다 전철역 출구를 잘못 나와 처음 보는 주위 건물에 당황해 마디숨을 고르느라 헉헉대었다. 벌써 몇 년째 두문불출하는 내 처지에 자고 나면 변하는 도심의 번화가를 가늠이나 할 수 있으랴! 그녀인들 이런 내 사정을 모를까만. 긴박한 상황에서 일순위로 떠오르는 사람이 나여서였겠지. 나는 그녀가 동요할까 봐 아주 침착하게, 우선 주위의 큰 건물 이름을 대보라고, 그리고 행인에게 물어보라고. 그래도 미심쩍으면 근처에 사는 딸에게 전화하라며 진정시켰다. 자식들에게 이런 일로 폐 끼치기는 자존심 상해서 싫다며 그녀는 일언지하에 잘랐다.

    해는 뉘엿뉘엿 불빛은 번쩍번쩍 여기가 거긴 것 같고 거기가 여긴 것 같아 진땀이 났다고 했다. 그녀는 "포도시(간신히) 왔다"며 경황 중에도 예의 그 밝은 웃음을 물고 보고한다. 그가 잘 쓰는 전라도 사투리가 그날 따라 더 정겨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내가 보기에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각종 약을 복용한다. 신체 균형이 깨져 그녀 말로 가로수에 머리를 박았다고 했다. 그래도 다음 날 또 나간다. 근처 공원 둑에서 캐온 쑥으로 현미떡을 만들어 건강식을 하는 야무진 면도 있는 친구다. 웬만한 지하철역에는 승강기가 있어 장 봐오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며 열무 한 박스를 가락시장까지 사러 간다. 굳이 캐리어 끌고 거기까지 갈 게 뭐가 있느냐고 채근하면, 왁자한 분위기에 에누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채마전 풍경을 재미있게 들려준다.

    요즘 애들 달콤한 것 좋아하니 양파 갈아 넣고 맛나게 담가서 근처 막내 딸내미 주고 떨어져 사는 큰딸도 다녀가라 하면 빈손으로 오는 법 없으니 맛있는 것 얻어먹어 좋고 그런 재미로 산다나…. 자식들 보듬는 걸 황혼의 낙으로 여기며 활기차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그의 삶이 부럽기도 하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온 안내문을 들고 근처 병원에 들러 치매검사를 했다고 한다. 100에서 7씩 거꾸로 빼기, 미로 찾는 그림 그리기를 한 문제도 못 풀었다고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며 잔뜩 풀이 죽어 있다. 그와 나는 20여 년 전 스포츠센터에서 만나 오늘까지 도타운 정을 나누고 있는 절친이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전화 받고 "당신 누구요?" 할 수도 있다 생각하면 두렵다. 한편 소탈하고 긍정적인 성격이니 몸살감기처럼 스쳐 지나가리라 믿어지기도 한다.

    "이 좋은 내 집, 천당 같은 이 집에서 죽을 때꺼정 살려면 자식들 짐 되잖게 자네 몸 잘 챙겨야 혀. 새겨들어, 귀 여리게 흔들리지 말구, 내 말 명심혀!" 일흔도 채 안 된 팔팔했던 그녀로서는 그때 영감님의 깊은 심중을 도통 헤아리지 못했다고 한다. 봉제 미싱 바늘에 꿰어 손가락 성할 날 없이 동동거리다 간 남편이다. 가까스로 정신 가다듬어 그녀 손에 통장 쥐여주며 신신당부한 그 의중을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태를 보니 알겠다며 훌쩍거린다. 추운 날 외출했다 현관에 들어서면 '훅' 더운 공기가 얼굴을 스칠 때, 물병 덥혀 시린 발 녹여 작업하던 남편 생각이 나 눈물 난다고 한다. 그의 유언대로 이 집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지만, 근근이 지내던 옆집 노파 요양원 가는 걸 보니 지난번 검사 결과가 마음에 걸린다고도 한다.

    TV 노래자랑 프로에서 한 출연자가 까불까불 손 흔들며 "엄마, 나 보고 있지? 사랑해!" 의기양양 환하게 웃어 보인다. "어머님 지금 어디 계신데요?" 사회자의 물음에 새파란 여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요양원에 계신다고 한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무덤 가기 전의 정류장이라는 거기도 못 간다니, 이런 마뜩잖은 재롱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녀는 항상 나에게서 '한 수 배운다'고 하지만 그가 나보다 한 수 위다. 소심한 성격에 매사 전전긍긍하는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늙어야 하나'를 은근히 가르쳐준다. 그녀야말로 백세 시대의 맞춤형 늙는 법을 십분 터득한 노파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