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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을 밑에서 떠받친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

로마제국을 밑에서 떠받친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

입력 : 2012.12.29 03:04

노예·검투사·매춘부… 고대 비문 모아 분석한 99% 로마인의 삶
돈으로 자유 산 노예 승부조작한 검투사 부와 자유 꿈꿨던 이들 희로애락 생생히 담아

99%의 로마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로버트 냅 지음|김민수 옮김|이론과실천|528쪽|2만9000원

"나는 주인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팔려 가게 될까? 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그들은 늘 이 세 가지 공포와 희망을 안고 살았다. 로마제국 인구의 약 15%를 차지한 그들은 가사노동과 농사에 동원됐고, 주인들의 성적(性的) 노리개였으며, 밤에는 복도나 계단 여기저기서 새우잠을 잤다. 주인이 남긴 음식을 조금이라도 손댔다간 "탐욕스러운 밥버러지"라는 욕을 먹었으며, 금지된 장소에서 대소변을 보면 자유인은 벌금만 냈지만 그들은 채찍질을 당했다. 로마제국 노예들이다.

미국의 고대사 학자(UC버클리 명예교수)인 저자는 해수면 아래서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빙산을 떠받쳤던 99% 로마인들(원제 Invisible Romans·보이지 않는 로마인들)을 발굴해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자료는 없었다. 그는 고대의 비문(碑文)과 파피루스의 파편을 모아 AD 1~3세기 평민 남녀, 노예, 해방노예, 군인, 매춘부, 검투사 그리고 산적과 해적의 삶을 모자이크처럼 재구성했다. 영웅호걸들의 로마사가 아닌, 로마판 '레 미제라블' 이야기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 시합이 열렸던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 로버트 냅 UC버클리 명예교수는 노예, 해방노예, 검투사, 산적과 해적 등 로마제국의‘밑바닥 인생’을 복원한다. /블룸버그 뉴스
1년에 3번 노예 축제

디오게네스, 이솝, 에픽테토스 등 노예 출신 명사는 잊자. 노예의 삶은 당연히 비참했다. "신이 혐오하는 저열한 인간이며 주인의 재산"이란 게 통념이었다. 발굴된 목걸이에는 "나는 도망 중인 노예입니다. 나를 잡아서 내 주인 조니누스에서 돌려보내면 금화를 받을 것입니다"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요즘 반려동물에게 채우는 목걸이와 다를 바 없다. 전쟁포로, 노예의 자녀, 내다버린 아기, 강도나 해적에 납치돼 노예가 된 이들은 평생 '자유'를 그리며 살았다. 물론 이들에게도 낙은 있었다. 매년 12월 말엔 '사투르날리아(농신제)' 7월엔 '여자 노예들을 위한 축제', 8월엔 '노예들의 날' 등 '노예 축제 3종 세트'가 있었다. 무엇보다 돈을 모으면 자유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해방노예'가 되더라도 주인은 '후원자(패트론)' 역할을 했다. 법률문서엔 해방노예는 주인의 아들과 동일시됐고, 죽으면 주인의 가족과 같이 묻었다.

“나는 도망 중인 노예입니다”라고 적힌 노예용 목걸이. /이론과실천 제공
폼페이 100명 중 한 명은 매춘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인 매춘은 로마에서도 융성했다. 폼페이 유적엔 다양한 매춘의 흔적과 음란한 벽화가 무수히 발굴됐다. 에이즈·매독도 없던 시절, 성적 방종은 넘쳤다. 매춘부는 술집에서 스트립쇼의 원조격인 나체무언극으로, 공중목욕탕에서는 목욕 시중을 들며 고객을 유혹했다. 매춘부의 공급처는 역시 노예가 가장 많았고 일부 자유인들도 돈을 벌기 위해 매음굴로 유입됐고, 국가는 매춘세까지 걷었다. 매춘부의 목적도 돈을 벌어 자유를 사는 것이었지만 노예에서 해방된 후에도 매춘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폼페이에서는 인구 100명당 1명꼴로 매춘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투사

"20쌍의 검투사들과 후보들이 10월 5일, 6일 양일간 쿠마이 지역에서 시합을 펼칠 예정임. 그날 십자가 처형과 맹수 사냥도 함께 벌어진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한 공고문은 당시 검투사 시합이 '산업'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노예나 전쟁포로 출신 검투사들은 철저한 훈련을 거친 뒤 시합에 투입됐다. 보통 1년에 1~2회 출전하는 이들은 스타였다. 여성들이 줄줄이 따랐고, 10여 차례 계속 이길 경우 부(富)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이 훈련받은 '식구'들 사이에선 '승부조작'이 벌어졌고, 경기가 과열돼 이웃 도시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져 원로원이 10년간 검투시합을 금지한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세쿠토르인 플람마는 30년 동안 살면서 34번 싸웠다. 그중에서 21번 이기고 9번 비기고 4번 졌다"는 비문에서 보듯 검투사들의 수명은 30세 이상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고대 로마의 보통 사람들이 남긴 비문을 보면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희로애락을 가진 인간이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찬란한 제국의 저 밑바닥에서 '자유'를 향한 열망으로 피땀 흘리고, 몸과 영혼을 바쳐야 했던 이들의 고단한 삶이 생생히 복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