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왜곡과 엉터리주장에 관한 반박자료이다.
물론, 이런 글을 봐도 동의하지 않으리란것을 잘 알지만, 한번 읽어나 보라고 일전에 갈무리해 놓은 글이다.
무척 긴 글이기에 반박들 중에 끝까지 읽을 위인이 있으런지 모르겠지만, 터무니 없는 자료로 박정희를 폄하한다고 반박할 자료가 없는게 아니란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
과거사위원회가 말하는 박정희의 친일파 근거부터 디벼보자..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이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이나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공무원 및 그시대 언론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 학자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큰건 작건 협력한 게 아니냐?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인가? 그리고,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간 손기정은 대황국신민의 자긍심을 높혀준 친일매국노라고 해야 되나?
그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 어떤 사회생활을 조선땅에서 공식적으로 할수가 있을까?
아예 시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는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박정희는 이렇게 살지 않고 만주군이 됐으니깐 '친일파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비난하는 당사자들이 그때 박정희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으면 모두 목숨을 당연히 내걸고 독립투사로 나서 일제와 싸웠을까? 하는 의문을 낳을 뿐이다.
진짜 나쁜 놈은 저렇게 훌륭한 삶을 산 위인을 두고 나보다 훌륭한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업적을 숨기고 악의적으로 모함하고 음해를 하는 세력들이다.
박 대통령은 위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는가?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북괴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자신의 과거경력을 미화하지도 않았다.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비밀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세계일보-
OOO들이 못 마땅할지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일제와 대립하고 투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입장에선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다.
저런 인물들한테 독립투사라고 훈장을 준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대한민국의 이념으론 이해할수가 없는 인물이다.
(진보좌익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바로 성장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첫번째 형태이며. 공산주의는 여기서 더 발전된 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라 규정함.)
왜냐면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이어받는다"라고 명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절대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평화적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반공의 정신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상해 임시 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공산주의자 집단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이 목적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일의 목적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념화 되어 민족이란 이름으로 포용할 없다. 따라서 김구 선생님과 함께 상해 임시 정부는..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그 활동을 돕는 자는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임정에서 축출하였으며,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한가지 증거가 있다. 상해 임정에는 성재 이동휘란 분이 계셨다. 이 분은 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군자금이 부족하여 활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동휘는 이들에게 몰래 임정의 자금을 지원 하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임시정부는 이동휘 국무총리를 해임 조치를 하였다.)
-----------------------------------------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고발
일제 패망과 함께 김일성은 소련군을 등에 업고 소련군 대위로 평양에 입성하여 38선 이북을 장악하였다. 곧바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은 헤알리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을 앗아 갔으며 골 깊은 민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였다. 전후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 댓 가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절반을 중국에게 헌납하였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일성, 김정일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으며 얼빠진 인간들은 보란 듯이 혁명열사 능을 참배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6.25동란 당시 북한의 부수상을 역임한 1급 전범이다. 좌파들은 박정희대통령의 현존하는 기념물을 없애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 민족의 원흉 홍명희의 생가를 복원하려는 천인공노할 음모까지 꾸미고 있다.
여운형은 일제 말(1943년) 수차에 걸쳐 일제의 학병지원을 독려한 당시의 신문기사가 발견되었다. 또한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한 명백한 친일파이자 남한 내 공산주의의 거두였다.
이런 여운형에게 노무현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2005년 3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
박정희가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청년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한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한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다. 청소년시절부터 군사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본에 대해 자꾸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하여 경찰,행정,학교를 장악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억압이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박정희에게 배운 제자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 ‘박정희’ 79쪽)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평소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벌주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하여 살렸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경숙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공부욕구와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위협이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어서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시절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발췌: 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 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 대통령(소위)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열우당 의원 부친들의 일제시대 행적-
1. 김근태 의장의 부친은 일제시대에 훈도였다.(당시 훈도는 군수 월급과 맞먹었으며 권한도 대단하였다)
2. 김희선의원의 부친 김일련(가나이 에이이치)은 만주경찰 특무로 독립군을 수도 없이 색출하여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3. 이미경의원의 부친 이봉권은 일본군의 핵심 사찰요원인 황군 헌병오장으로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4. 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도 헌병 오장으로 군림하며 독립군 색출과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5. 정동영 전 의장의 부친은 착취와 수탈의 최 일선 기관인 조선식산은행 산하 금융조합서기로 5년간 근무하였으며 6.25동란 당시의 행적도 불분명하다.
6. 유시민장관의 백부는 면장이었고 부친은 훈도였다.
-------------------------------------------------------------------------------
다음은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다.
1)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일 뿐이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된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았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이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다.
진보좌익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과 문헌 사료를 북한 김정일과 남한의 친북좌경세력 특히 친노방송과 언론들이 샅샅히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로 지어내 둘러대는 것이 바로 연변학계,연변자료 어쩌구 하면서 공갈치는 것이다. 말이 학계이지 그들은 완전 북한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2)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3)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대통령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대통령이 소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신념을 가지고 한 민족교육 및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이기청씨가 밝힌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이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4)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이다.
이런 글에서는 박정희가 "요시"하며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근무할 그당시 소속부대의 작전지역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박정희는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청더 (承德,승덕)지방 이였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다.. 또한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없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구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이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이다.
여러분 팔로군이 무엇인가?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의 팔로 OOO 공산군이였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중국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이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다,
더욱이 알다시피 팔로군은 중국통일후에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이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이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이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바치는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 독립군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독립투사들조차 공격해서 상당수를 죽여버리기도 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조선의 해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전 세계 공산화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그들만의 혁명을 추구했을 뿐이다.
5)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길 바란다. 현재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출신이란 저서에 대해 박대통령 유족이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재판중이다.)
6) 변신의 달인 박정희는 한때 OOO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한다.‘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OOO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된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OOO라 몰아붙일 수 있는가?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다만.
7)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이것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을 운운하는데 어쨌든 창씨개명으로는 친일파의 기준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항이다.
*김대중의 친일 행각과 부정적 평가.
- 도요타 다이쥬로 창시개명을 했다.
- 학생 시절 일본으로 망명하여 친일 정신이 투철하였다.
- 일본인 학생 못지않게 일왕에게 충성하였으며 세계 2차 대전 시에는'천황폐하를 위하여 대일본제국에 뼈를 묻겠다'라고 하기도 했다.
-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동족들의 재물을 거둬서 착취하였다.
- 한반도가 해방되자 재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정치활동을 했다.
- 김대중이 89년도에 히로히토일왕이 죽었을 때 주한일대사관을 찾아가 '몰래' 조문을 하였다는 것은 그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평가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돈으로 샀다.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남한을 북한에 팔아넘기려 하고있다. - 존 메이저 전 영국 수상
내가 김대중이라면 결코 북한에 협력하지 않겠다 - 존 매케인 전 공화당 대선후보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개가 될 것이다. - 댄 퀘일 전 미부통령
김대중은 살아있는 친일파중 친일파이다. - 라이트코리아 시민단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다. - 이한기 전 국무총리 서리
DJP연합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 남덕우 전 국무총리
김대중은 야당시절부터 줄곧 거짓말만 늘어놓았다. -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김대중에게 내각책임제와 박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약속받고 지지했지만 김대중은 그런 나를 속였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8) 박정희 그는 대통령으로써의 친일적 언동했다?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러면 그때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했는가?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옛날 일제시대 자기를 가르친 일본인 선생을 만나 듣기 좋은 소리 좀 했기로소니 그게 전부 친일인가?
못 먹고 사는 국민들을 먹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 가난한 나라로서 손을 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인데 지도자면 국민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적 사적 외교석상에서 노통처럼 나오는 데로 막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언행인가?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통이 취임후 정작 미국가서는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9) 박정희 대통령으로서 친일적이며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했다.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니다)
즉 8억달러 주겠다는데 박 대통령이 어떻게 안받았겠는가?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는가?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것이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협상의 출발부터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협상카드는 별로 없었다. 더구나 사과를 하기를 싫어해 현재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이 죽길 기다리는 일본이 그때당시 사과를 다 받아 낼려고 하였다면 현재까지 일본과의 국교는 계속 단절 되어 있을것이 아닌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 대통령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았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 대통령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고 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일 뿐이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는다.
------------------------------------------------------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과 농촌·중소기업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소득 격차를 사회문제로 낳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처럼 쓰고 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29일 열리는 ‘교과서 포럼(상임대표 박효종)’의‘중,고등학교 경제 관련 교과서 이대로 좋은가’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교과서 서술이 객관적인 통계 수치를 무시한 오류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큰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 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한수기자 hslee@
뱀다리:
이렇게 긴글을 끝까지 읽은 분에게 경의를 표하며, 내 주위에 6.25때 월남한 실향민의 이야기를 한번 소개할까한다.
이 사람 이상하게도 6.25는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고향이 개성이라는데, 자기는 6,25새벽에 자기집 앞에 분명 국군과 인민군이 전투를 했엇고, 개성을 떠나 월남하게 된것이 국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해서 경황도 없이 월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평소 행실을 봐서는 정신이 이상한것 같진 않은데, 그런말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서 말을 잘하지 않지만, 6.25가되면 술에 취해서 해마다 같은 소리를 해댄다. 고향 생각난다면서..
자기말로는 그때 나이가 9살인가 10상이었는데 지금 70이 넘었으니 대충 맞기도 한데, 부모는 놔두고 청년인 삼촌2명과 내려왔다는데, 죽어도 대한민국이 북침한거라고 생각한다나?,...
박정희에 관한 엉터리 자료도 이와같은 사람들의 자료라고 보면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상대하지 않고 놔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그게 진실인양 될수도 있다는것이지..
지금까지 박정희 사후 30년간 엉터리 주장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또 그럴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바로 말할수 있어야 한다.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는 부류들이 어떤자들인지 적극적으로 싸워서 굴복을 시켜야 된다는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 한국을 만든 박정희 전대통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하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뒤따라갑니다” (0) | 2013.09.11 |
---|---|
5·16은 '쿠데타'… 하지만 대한민국의 오늘 만들었다 (0) | 2013.04.26 |
역사 왜곡 다큐 '백년전쟁' 반박 동영상 나와 (0) | 2013.03.28 |
박정희 대통령이 탔다는 1968년식 캐딜락,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날 느닷없이 도심에 (0) | 2013.02.26 |
"우리는 50년전 파독 광부·간호사… 공항 도착하니 정부 의전차량이 마중 조국은 우리를 잊지 않고 불러줬다 (0) | 201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