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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한국 키운 실버들(독,광부,간호부등)

[만물상] 파독(派獨) 근로자 기념관

[만물상] 파독(派獨) 근로자 기념관

  •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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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5.23 03:01

    가난을 벗어보겠다며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젊은이들은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형 스크린엔 50년 전 그들이 섭씨 35도 지하 1000m 탄광에서 검댕투성이로 탄을 캐는 모습이 흘렀다. 19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 장면도 이어졌다. "나라가 못사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이 고생 하는 걸 보니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우리만은 다음 세대에게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모두들 그날로 돌아간 듯 기념식장이 숙연했다.

    ▶어제 서울 양재동에 문을 연 '파독(派獨) 근로자 기념관'에 찾아갔다. 1960~70년대 독일에 광부·간호사로 가 청춘을 바쳐 일했던 분들이 꿈꿔 온 정신의 보금자리다. 4층 건물 외벽을 하얗게 칠하고 베란다마다 빨간 꽃이 담긴 화분들을 내놓아 유럽 분위기를 풍긴다. 300여 파독 근로자는 오랜만에 옛 동료 손을 붙잡고 "이게 누구야?" 하며 안부 묻기 바빴다.


    
	[만물상] 파독(派獨) 근로자 기념관
    ▶1960년대 초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이 69달러였다. 유엔이 조사한 120개국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못살았다. 정부는 외화 벌 궁리를 하다 독일 광산·병원에서 험하고 궂은일 해낼 인력을 수출하기로 했다. 1963년 12월 광부 1진 121명을 보냈다. 이듬해 2진 500명을 뽑을 땐 4만6000명이 지원했다. 70년대 후반까지 광부 8000명, 간호사 1만1000명이 떠났다. 이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고국에 송금한 1억153만달러가 고속도로 깔고 제철·시멘트·비료·자동차 산업 일으키는 종잣돈이 됐다.

    ▶"동생 보내녹코 집에서 얼마나 우런는지 몰라. 하늘에 비향기가 지날 때마다 동생 생각해." 기념관 전시실에는 독일로 간 동생을 안타깝게 그리는 형의 편지가 남아 있다. 광부와 간호사 중엔 독일 갈 여비가 없어 소 팔고 논 팔거나 빚을 진 이도 많았다. 1964년 어느 광부의 급여 명세서도 전시돼 있다. 지상 근무는 일당 1290원, 땅속 근무는 1920~2500원…. 이나마도 당시 국내 공무원 봉급의 몇 배였다.

    ▶개관 기념식이 진행되면서 참석자들은 몇 차례나 박수로 하나가 됐다. 사회자가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고 남을 돕는 나라가 됐다"고 말할 때 박수 소리가 가장 컸다. 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데는 파독 광부·간호사와 월남 파병 용사·근로자, 중동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이국땅에서 피땀 흘린 분들 덕이 컸다. 파독 근로자 기념관에 가서 그들의 헌신을 되새겨보자. 우리는 뒤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지 저절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