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의학,의료/놀라운 의학 기술

진리 보는 서로 다른 눈, 동서양 의학 차이 낳았다

진리 보는 서로 다른 눈, 동서양 의학 차이 낳았다

  •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

입력 : 2013.04.13 03:25 / 수정 : 2013.04.13 05:07

서양 해부도는 근육을 자세히 묘사, 동양은 경맥·경혈 자리마다 점찍어
서양 의술은 선명함을 지향했고 한의학 "진리=모호" 도가 영향받아

몸의 노래: 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구리야마 시게히사 지음|정우진·권상옥 옮김
이음|328쪽|1만8000원

우리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고대 서양의 인체 그림이나 조각품에는 수많은 근육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많은 작품에서 '식스팩'을 비롯한 여러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다. 매우 익숙한 모습이긴 한데, 여름의 해변을 떠올리면, 아니 자신의 벗은 몸을 거울에 비춰보기만 해도, 그 작품과 실제 인체 사이에 괴리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반면 고대 동양의 미술품 중에서 근육이 도드라지게 표현된 작품을 본 기억이 있던가. 벽화 등에 표현된 무인(武人)들조차 몸매는 그저 그런 편이다. 보통 사람들의 몸매는 대체로 '후덕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동·서양 의학의 몸에 대한 인식도 비슷하다. 서양의학은 일찍부터 해부에 몰두했다. 당시에는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질병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수많은 인체해부도가 그려졌고, 대부분 근육을 특히 자세히 묘사했다. 하지만 동양의학에는 도무지 근육의 개념 자체가 없었다. 대신 경맥(經脈)과 경혈(經穴)이 있었다. 우리가 한의원에서 볼 수 있는 인체 그림에는 여러 개의 선이 몸 곳곳을 지나가고, 선 위에는 여러 개의 점이 찍혀 있다. 선은 맥의 흐름을 뜻하는 경맥이고, 점은 경혈, 곧 침을 놓는 자리다.

서양의 인체도는 해부학적 관심을 바탕으로 근육을 세밀하게 표현했다(오른쪽). 반면 한의학에서 몸을 이해하는 방식인 경맥(經脈)과 경혈(經穴)은 서양 의학에 없는 개념이다. /토픽이미지, 그래픽=이철원 기자
동서양의 몸에 대한 인식은 이렇듯 달랐다.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한 책은 과거에도 많았다. 하지만 미국 하버드대 교수이자 동서양 비교의학사 분야의 권위자인 구리야마 시게히사가 쓴 이 책은 그 차이가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진맥의 변천에 관한 서술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고대에는 그리스의 의사들도 진맥을 했다. 의사가 환자 손목 위에 손가락을 얹는 모양도 흡사했다. 맥을 짚음으로써 질병을 진단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냉정하고 합리적인 정확성, 저자의 표현으로는 '선명함'을 지향했기 때문에, 맥박에 심장이 뛰는 횟수 이상의 비밀이 숨어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었다.

하지만 중국의 의사들은 2000년 동안 진맥의 가치를 부여잡고 있었다. 동양의학에서 맥의 표현은 지극히 모호하다. 맥이 그득한지, 비었는지, 매끄러운지, 거친지를 살핀다고 하고,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쥐와 같은, 진주가 부드럽게 구르는 것 같은, 비에 젖은 모래와 같은, 물 위의 나무처럼 떠도는, 새의 꽁지를 건드리는 미풍과 같은, 등의 표현들을 구사한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인들에게 존재하는 화사하고 화려한 상상력 때문이며, '최고의 진실은 분명한 표현을 거부한다'는 도가적 전통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동서양의 고대 철학과 예술, 사회와 문화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든다.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시의 골목길 사이를 누비는 배달부처럼, 구체적으로 자신의 가설을 지지해줄 동서양의 고전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무려 주석이 600개 이상 달렸다.

서양인들이 왜 근육에 집착했는지, 혈액이나 혈기에 관한 동서양의 인식은 어떻게 달랐는지, 서양에서 오랫동안 '사혈' 요법이 번성하는 동안 중국에서는 침술이 발달한 원인은 무엇인지에 관한 해석들이 흥미롭게 읽힌다. 사혈과 침술은 닮은 곳이 많다면서, 침술이 사혈에서 발전했거나 고대 그리스와 중국 사이에 유전적 친족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참신하다.

기본적으로 대중서라기보다는 학술서이고, 워낙 방대한 동서고금의 자료가 등장하기 때문에 쉽사리 읽히지는 않는다.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가 그리스와 중국의 문헌을 인용하면서 영어로 저술한 책을 한국어로 옮긴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번역자들의 노고로 인해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읽는 속도를 조금만 늦추면, 곳곳에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표현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생긴다. 가령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열정과 상상이 있을지 모른다", "다른 이들이 알 수 없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철로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더 밝다는 이유로 인접한 도로에서 지갑을 찾고 있는 상황" 등의 표현이 그렇다.

이 책은 의학의 역사를 소재로 한 철학책인 동시에, 철학적 방법으로 서술한 의학사(史)이기도 하다. 과학철학이나 과학사, 혹은 동서양 문화 비교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