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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양성소(마포-성미산 학교)/종북,좌파의 말로

"이승만 외교가 獨立 보장한 카이로선언(1943년 연합국 美·英·中이 한국 독립을 보장) 이끌어

"이승만 외교가 獨立 보장한 카이로선언

 

(1943년 연합국 美·英·中이 한국 독립을 보장) 이끌어"

한국을 있게한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 

 

[참조]  정부는 북괴보다 종북,좌파 부터 없애야 한다.

  • 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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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3.19 03:05

    원로 역사학자 '백년전쟁 논란'에 일침… "좌파 역사가들 김일성 무장투쟁만 神話化"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

    이승만이 분단 주역에 친일파?
    - 美여론 돌려놓은 외교도 항일, 그의 업적은 '功 7 過 3'이다
    '커밍스의 자식들' 현대사 망쳐
    - 대한민국을 美괴뢰국가로 봐… 엉터리 선동이 역사로 둔갑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 /김기철 기자
    "대한민국은 휴화산 위에 앉아 있다. 한국 사회를 갈라놓는 이데올로기 분열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균형 잡힌 현대사 교육을 통해 이걸 진정시켜야 하는데, 집권자들은 이 문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원로 역사학자 유영익(77) 한동대 석좌교수는 답답해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을 친일파, 반역자로 몰아붙이는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유튜브에서 조회 수 수백만 건을 기록하는 현실에 혼자 맞서기엔 버겁다고 했다. "4·19 때 서울대 정치학과를 막 졸업했다. 이승만이 독재자이고 그의 잘못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훗날 이승만을 연구하면서 이승만이 잘못한 것만 기억하고, 그의 업적은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8일 아침, 경북 포항의 한동대 강의차 서울에서 KTX 열차로 내려가는 유 교수를 동대구까지 동승했다.

     

    유 교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시각의 분열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승만이 독재를 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승만의 업적은 최소한 '공(功) 7, 과(過) 3'으로 봐야 한다."

    ―'백년전쟁'에선 이승만이 1912년 '워싱턴포스트' 기자회견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했다며 친일파라고 한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이 무능과 부패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의 대일관(對日觀)을 알려면, 필요에 따라 한 인터뷰가 아니라 그가 1913년에 쓴 '한국교회 핍박'이라는 글을 봐야 한다. 이승만은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이승만이 노골적으로 친일한 적은 없다. 그랬다면 1919년 한성정부를 비롯,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추대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현대사 연구자들은 이승만을 건국의 주역이 아니라, 분단을 가져온 책임자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의 김일성이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갖고 있고, 남한에선 여운형이 지도자가 됐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해방 당시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에 친소(親蘇) 정권이 들어서고, 미군이 점령한 지역에선 친미(親美)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었다. 이승만이 택한 노선은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하고 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는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지 '소망'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좌파 진영에선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편 외교 운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신화화하는 데서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김일성같이 몇 사람을 찔러 죽이면 대단한 일로 생각하는데, 우리가 그걸로 독립을 얻은 게 아니다.

     

    이승만이 미국 여론을 바꿔놓는 외교·홍보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 1943년 카이로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발표가 나왔다. 역사 교육이 제대로 안 돼 무장투쟁만 높이 친다. 책상 위에서 편안하게 펜대를 놀리는 정도로 외교·홍보 활동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 현대사 연구가 여전히 브루스 커밍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커밍스의 가장 큰 문제는 베트남 반전운동을 하던 그가 미국의 대(對)아시아정책을 비판하는 시각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한 일은 모두 잘못됐다는 전제 아래 한국 관련 자료를 읽었다. 자기 생각에 자료를 끼워 맞춘 셈이다. 6·25 북침설은 수정했다지만, 대한민국이 미국의 괴뢰국가로 탄생했다고 보는 관점은 바꾸지 않았다. 대다수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은 여전히 커밍스의 자식들이다."

    유 교수는 "현대사 연구를 게을리 한 역사학계에 한국 사회 이데올로기 분열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학자들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현대사 연구를 제대로 해왔다면, 엉터리 같은 선전·선동이 역사로 둔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학자는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