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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힘들다고요? 그러니 인생이죠"

"죽을 만큼 힘들다고요? 그러니 인생이죠"

입력 : 2013.03.15 03:03

[전 세계 1800만 독자 거느린 소설가 윌리엄 폴 영, 신작 '갈림길' 들고 訪韓]
소설 속 주인공은 내 모습
어릴적 상처, 38세 되어 풀어… 뇌종양 딸도 신의 뜻이라 여겨
체면이 중요한 한국사회, 힐링 모색한다니 좋은 현상

"힐링(healing·치유)도 너무 많으면 지겹죠. 하지만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니까요. 그 과정이 없으면 자기 속을 들여다볼 기회를 절대 가질 수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 전체가 힐링을 모색하고 있다는 건 긍정적입니다. 한국인은 체면이 너무 중요해서 정말 갖고 싶었던 기쁨과 만족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젠 드러내 놓고 추구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소설 '오두막'으로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 소설가 윌리엄 폴 영(Young·58)은 뿌듯한 기쁨에 차 있었다. 5년 만에 발표한 신작 '갈림길'(Cross Roads·세계사 펴냄)과 함께 14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지난 5년간 부와 명예가 넝쿨째 굴러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내가 지금 참 행복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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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폴 영은“잘못을 저질렀을 땐 무조건 용서를 빌어라. 부끄러운 마음에 우물쭈물하다가는 사람을 잃고 관계를 망치고 결국엔 못난 나만 남는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갈림길'은 성공한 40대 사업가 앤서니가 갑작스러운 혼수상태에서 자신의 황폐한 내면과 만나는 이야기. '오두막'이 성폭행 살인범에게 어린 딸을 잃은 한 남자가 내면을 상징하는 오두막에서 신(神)을 만나는 이야기라면, '갈림길'은 상처투성이 내면을 정화하고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800만부 팔린 '오두막'처럼 '갈림길'도 미국에서 '초판 100만부 제작, 출간 8주 남짓 만에 전량 소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앤서니의 모습은 젊을 때의 영을 살짝 닮았다. 영의 소설이 폭력과 성추행으로 얼룩진 자전적 경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였던 부모는 모든 에너지를 신에게 바쳤고, 신앙 이외의 곳에서 치솟는 분노는 자녀에게 풀었다. 아버지는 그를 마구 때렸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침묵으로 묵인했다. 부모를 따라간 뉴기니에서는 그곳 원주민들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어린 시절 상처를 입고 나니 어떻게 살아남을까만 생각하게 됐어요. 어딜 가든 문과 창문을 찾는 게 버릇이었죠. 사람들과 관계 맺기도 힘들었어요. 마음속 미쳐버릴 것 같은 분노를 표출할 방법을 몰랐거든요."

영은 자기만의 성(城)을 쌓고 그 안에 모든 감정을 꾸깃꾸깃 집어넣었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 만족, 자유를 그는 도통 못 느꼈다. 사람들이 하는 말도 본래 의도와 다르게 들렸다. 결혼 초기, 흰 옷과 색깔 있는 옷을 한꺼번에 세탁해 아내에게 혼이 났다. 아내는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잔소리를 한 거였지만 그의 귀에는 "이 루저(loser·실패자)야! 내가 왜 너랑 결혼했는지 모르겠다" 같은 막말로 들렸다.

영은 38세가 돼서야 비로소 성을 허물 수 있었다. 계기는 아내의 친구와 저지른 불륜. 아내에게조차 어린 시절의 아픔을 숨겼던 그는 그제서야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꼬박 11년간 '치유'에 매진했다. "삶을 뒤집고 뜯어고치는 게 힐링이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의 날 받아들이는 게 힐링이죠." 그는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딸이 5년 전부터 뇌종양을 앓고 있다. 가슴이 너무 아프지만 신께 아이를 낫게 해달라고 빌지 않는다. 그것 또한 신이 주는 뜻이라 생각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개인의 경험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건 한계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인정하면서 "거창한 작가가 될 생각이 없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욕망도 없다. 지금 중요한 건 당신(기자)과 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이렇게 얘기를 나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와 온전히 화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열여덟 살짜리 조카가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강간을 당했어요. 그 후 그 애가 '할아버지(영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 지구상의 모든 남자를 증오했을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아버지 역할은 잘 못했지만 할아버지 역할은 제대로 하신 거죠." 영은 "인간은 모든 걸 망가뜨릴 수 있지만 치유할 수도 있다. 정말 신비롭지 않으냐"며 잔잔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