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를 잡아먹은 순간, 에이즈의 역사가 시작됐다
- 기사
입력 : 2013.03.02 03:04
바이러스 전문가가 쓴 병원균의 역사
사냥·도축 시작되면서 야생동물에 잠복한 균, 인간으로 옮겨져
오늘도 안전하지 않다…
주사기·수혈·이식도 바이러스 확산의 주범
네이선 울프 지음|강주헌 옮김
김영사|388쪽|1만5000원
어떤 태풍이 세력을 키우며 북상하고 있다는 예보를 종종 흘려들었다. 비바람쯤이야 내 생활과는 별 관계없는 일이겠거니, 과소평가했다. 저러다 또 중국이나 일본 쪽으로 방향을 틀겠거니, 무시했다. 이 책도 첫인상이 그랬다. '바이러스 폭풍(The Viral Storm)'이라는 제목은 과학으로 위장한 공갈이나 겁박(劫迫)으로 들렸다.
그런데 틀렸다. 문명은 최첨단을 질주하고 있지만 대참사를 부르는 병원균에 대한 지식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2001년 4월부터 9·11을 지나 2002년 8월까지 세계에서 약 8000명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정확히 8년 뒤인 2009년 4월부터 2010년 8월까지는 1만8000명이 H1N1(돼지독감)으로 사망했다. 저자는 묻는다. "무엇이 더 위중한 위협인가?" 이 책의 목적은 곧 닥쳐올 바이러스 폭풍을 이해하는 데 있다.
◇병원균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다
병원균 중에 가장 작으면서 힘센 게 바이러스다. 유전물질(DNA나 RNA)과 단백질 막으로 이뤄진 바이러스는 독자 생존이 불가능해 다른 생명체에 기생해야 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숙주 세포를 감염시켜야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비롯한 병원균의 관점에서 인간은 서식지일 뿐이다.
- 에이즈 바이러스(HIV)의 역사는 사진 좌우의 두 원숭이 종(種)으로부터 시작된다. 왼쪽이 작은흰코원숭이, 오른쪽이 붉은머리 망가베이다. 두 원숭이는 자연 상태에서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SIV)에 감염되는데, 침팬지가 이들을 먹어서 생긴 잡종 바이러스가 약 100년 전 인간에게 전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망고를 먹는 과일박쥐〈사진 가운데〉는 돼지에게 니파 바이러스를 옮긴다. /김영사 제공
숙주를 약탈하는 수법에 따라 병원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치명적이면서 확산 속도는 느린 놈, 그리고 덜 치명적이지만 급속도로 전염되는 놈이다. 그런데 병원균은 역동적이고 돌연변이도 일으킨다. 바이러스 전문가인 저자는 "H1N1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서 사람이나 동물 체내에서 H5N1(조류독감)과 만나 천지개벽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치명적이고 확산 속도도 빠른 바이러스의 창궐이다.
◇병원균 예보도 가능하다
"병원균 세상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800만년 전 우리 유인원 조상이 사냥을 시작한 것"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사냥과 도축으로 야생동물에 잠복한 병원균이 다른 종(種)으로 이동할 고속도로가 뚫렸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을 사냥하는 침팬지와 인간은 각자 다른 병원균을 몸에 축적해왔지만 서로 병원균을 교환하는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에이즈도, 말라리아도 야생 유인원으로부터 비롯된 재앙이다.
니파 바이러스나 뎅기열의 경우처럼 가축은 야생동물의 병원균을 인간에 전하는 배달부 노릇을 한다. 부적절한 주사기와 수혈, 장기이식 때문에 치명적인 병원균이 퍼진 사례를 다룬 대목도 충격적이다.
이 책은 경고와 비관에 머물지 않는다. 주요 위험지역에 '병원균 파수꾼'을 배치하고 생물정보학 등에 힘입어 전염병의 준동을 예측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인구가 증가하고 세상이 밀접하게 얽히면서 바이러스 폭풍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 예보를 담은 이 책은 친절하고 정밀하며 믿음직스럽다. 과학 교양서도 이럴 땐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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