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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여행

[만물상] 왕희지 글씨

[만물상] 왕희지 글씨

  • 김태익 논설위원

    입력 : 2013.01.11 23:28

    중국 저장성 사오싱(紹興) 교외에 난정(蘭亭)이라는 유적이 있다. 왕희지(王羲之)가 서예사 최고 걸작 '난정서(序)'를 쓴 곳이다. 기념관에는 중국 역대 내로라하는 글씨 대가들이 왕희지를 흉내 내 쓴 제2, 제3의 '난정서'들이 수십 점 걸려 있다. 안진경 우세남 소동파 구양순 조맹부 정판교…. 그러나 정작 왕희지가 쓴 '난정서'는 없다.

    ▶왕희지는 354년 3월 친구·후배 문인 마흔한 명과 난정에서 봄맞이 잔치를 열었다. 경주 포석정처럼 흐르는 물에 술잔 띄우고 누군가의 앞에 잔이 머물면 시를 한 수 짓게 하는 자리였다. 이 시들을 한데 묶어 서문을 붙인 게 '난정서'다. 200여년 뒤 당(唐) 태종은 왕희지 글씨에 빠졌다. 왕희지의 글씨를 거의 다 모았지만 '난정서'만은 보질 못했다. 당 태종은 왕희지 집안에 내려온 '난정서'를 온갖 계략을 다해 손에 넣었다. 죽을 때가 되자 아들에게 "꼭 '난정서'를 나와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중국 진서(晋書) 왕희지전(傳)은 왕희지 글씨에 대해 이렇게 썼다. "떨어지는 이슬을 구름이 이어주듯 끊어질까 싶으면 이어지고, 봉황의 날갯짓에 용이 휘감기는 모습 같구나." 그러나 지금 지구상엔 왕희지가 직접 쓴 글씨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당 태종이 죽으면서 갖고 있던 왕희지 글씨 2300점도 모두 땅속에 함께 묻었다고 전해 온다. 후학들은 누군가 왕희지 진본(眞本)을 보고 베껴 쓴 모본(模本)을 왕희지 글씨로 알고 배우고 또 베껴 쓰며 서예의 전통을 이어 왔다.

    ▶일본에서 왕희지 글씨 모본 서첩(書帖)이 새로 발견됐다. 당나라 때 중국에 갔던 일본 사신이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가로 10.1㎝, 세로 25.7㎝ 종이에 '大報期轉呈也(대보기전정야)'를 비롯한 스물네 글자가 쓰여 있다. 일본 전문가들은 "이처럼 시기가 이르고 상태가 좋은 왕희지 모본은 세계에 열 점밖에 남아 있지 않다"며 '세기의 발견'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경북 군위 인각사에 있던 일연선사비(碑)가 왕희지 글씨들을 모아 세운 것이다. 왕희지 글씨를 4000자나 집자(集字)한 예는 중국에도 없다. 조선에 왔던 중국 사신들은 이 비문을 탁본 떠 가져가는 것이 최고의 귀국 선물이었다고 한다. 탁본 작업이 너무 잦다 보니 글자가 뭉개지고 비석에 흠집이 나 2006년 일연스님 탄생 800년을 맞아 복원했다. 일본서 발견된 한 장의 종이가 사라져가는 한·중·일 붓 문화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