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11 03:22
자원 외교 비리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전(前)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 직전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을 지칭) 유럽 순방을 수행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10만달러,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 후보 캠프의)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7억원을 줬다"고 주장한 녹음 내용이 10일 공개됐다. 허·김 전 실장은 각각 현 정부 초대·2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또 성 전 회장이 자살할 때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메모지에는 김·허 두 사람 이름과 함께 '유정복(인천시장) 3억, 홍문종(새누리당 의원) 2억, 홍준표(경남지사) 1억, (서병수) 부산시장 2억, 이완구(국무총리), 이병기(청와대 비서실장)'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대부분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새누리당·정부·청와대 요직을 맡았거나 맡고 있는 인물들이다. 만약 리스트 내용이 사실이면 정권 전체의 도덕성 문제로 바로 연결된다. 국민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리스트가 다 사실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돈을 받았다고 지목된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녹음에서 성 전 회장은 2006년 당시 현역 의원이었던 김 전 실장을 '야인(野人)'이라고 하는 등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성 전 회장 폭로에는 당시 정황과 시기, 장소, 액수, 등장인물 등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온다.
실제 유력 정당의 대선 후보급 정치인이 외유를 떠날 때 당 안팎에서 '후원자'들이 돕겠다면서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정치권에선 오래전부터 있던 얘기다. 2004년 이른바 '오세훈법' 통과로 정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이후 대선 때 여야 진영의 핵심 인사들이 후보와 관계없이 '자급자족'하는 방식으로 선거 자금을 마련해 썼다는 것도 공인된 사실이다.
결국 수사를 통해 진실 여부를 가리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다. 성 전 회장 주변을 확인하면 녹음 내용에 나온 '10만달러'의 환전 기록이나 돈을 건넸다는 호텔·헬스클럽의 출입 기록 등 흔적이 나올 수 있다. 성 전 회장이 "김 전 실장과 같이 왔었다"고 한 김 전 실장의 수행 비서, "허 전 실장에게 돈을 줄 때 심부름을 했다"고 한 경남기업 직원의 증언도 들어봐야 한다. 성 전 회장이 건넸다는 돈이 정치 자금 성격이라면 공소시효 5년이 끝난 상태다. 그러나 권한을 가진 공인에게 뭔가 반대급부를 바라고 준 뇌물(賂物)이라면 공소시효 10년이 아직 지나지 않아 기소가 가능한 사안이다.
문제는 수사 주체(主體)다. 원칙적으로는 검찰이 맡는 게 맞다. 그러나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 핵심부를 겨냥한 수사에서 국민이 납득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은 기억이 별로 없다. 올 초 청와대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수사만 해도 핵심인 '비선(�線) 실세들 국정 농단 의혹'은 끝내 파헤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더구나 수사 대상이 될 김·허 두 전직 청와대실장은 모두 현직 시절 청와대 인사위원장으로서 검찰 조직 인사에 깊숙이 간여했고, 김기춘 전 실장은 작년 말부터 사임설이 돌다가 올 2월 검찰 인사를 단행한 뒤에야 물러났다. 지금의 검찰이 현재의 권력자들을 상대로 의혹을 샅샅이 뒤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설혹 검찰이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수사 결과를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는 결국 특별검사에게 수사를 맡기는 길밖에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 상설특검법상 국회는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이 필요할 경우' 특검 수사를 의결할 수 있다. 현직 총리, 전·현직 청와대 비서실장, 여당 소속 중진 의원과 시·도지사의 이름이 올라 있는 '성완종 리스트' 수사는 이 요건에 해당한다.
의혹의 당사자들도 특검 수사를 피할 이유가 없다.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수사를 통해 자신의 결백이 증명되기를 바랄 것이다. 특검 수사를 통해 진실을 가려달라고 스스로 나서는 게 국민 앞에 떳떳하고 나중의 정치적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절벽 끝에 홀로 서서 누구도 버릴 수 있다는 각오로 측근들 비리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 측근들의 불법 자금 수수가 사실로 확인돼도 상처를 입겠지만, 그것을 덮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면 더 헤어나올 수 없는 궁지로 몰릴 것이다. 4대 개혁이고 뭐고 국정 추진 동력(動力) 자체를 잃게 된다. 자칫 남은 임기 3년을 절름거리는 신세로 허송하게 될 것이다. 박 정권은 출범 이후 가장 심각한 고비를 맞았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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