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4.20 03:13
"항아리가 50만엔? 뭐가 그렇게 비쌉니까?"
1955년 일본 교토(京都) 게이한산조(京阪三條)역 인근의 상점 '야나기(柳)'. 말간 백자 항아리에 사로잡힌 37세 재일 교포 청년은 호된 가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선 백자니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것은 좀처럼 없습니다." 장식 없이 흐르는 곡선, 매끄러운 순백의 피부에 매혹된 그는 결국 1년 기한의 월부(月賦)로 항아리를 손에 넣는다. 일본에 흩어져 있는 조선 문화재 1700여점을 모아 교토 시내에 '고려미술관'을 세운 정조문(鄭詔文·1918~1989)의 수집 이력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씨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고국을 떠났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좌절한 아버지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교토로 건너갔다. 아홉 살에 소학교 4학년에 편입, 초등학교 3년이 정조문이 받은 학교 교육의 전부.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 대여섯이 그에게 돌을 던졌다. "조선 정벌이야!" 부모는 생계를 위해 베를 짰지만, 조선인이 만든 옷감은 '흠집 있는 물건' 취급을 받았다. 이를 악문 정조문은 서른 무렵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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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고려미술관' 설립자인 故 정조문. /다연 제공
생전의 그는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남북이 통일되는 그때 조국에 돌아갈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대신 문화재를 사 모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풀었다. 정신적 동지였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현 고려미술관장은 "그의 수집병은 단순히 좋은 미술품이 탐나서가 아니라 일본이 빼앗아간 조국의 미술품을 되찾아야겠다는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증언한다. 해외 박물관 중에서 우리 유물만을 전시한 곳은 고려미술관뿐이다. 소장품은 모두 일본에서 개인이 사 모은 것들. 그 땀의 시간이 애처롭다.
귀한 문화재를 한 점 한 점 만나는 일화가 생생하다. 하얀 벽면의 수장고에서 녹청색(綠靑色) 통일신라 범종을 만나던 순간, 그는 쳐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1200년 전 비천(飛天)의 음색이 건물 안에 소용돌이치자 "바다 건너 신라까지 울리겠네" 하며 웃었다. 소뿔을 얇게 썰어 반듯하게 만든 화각 공예품, 형형한 눈빛의 호랑이가 그려진 민화의 의미까지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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