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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세계정세

2012.12. 한국 지성인의 공백상태.

[태평로] 2012년 12월, 한국 知性은 공백 상태

  • 이한우 기획취재부장

  • 입력 : 2012.12.06 22:52

    데카르트·칸트와 쇼펜하우어는 近代 공동체의 책임의식 길러줘…
    80년대 이후 識者 '촌스럽다' 외면해… 혁명의식만 남고 공공의식은 실종

    이한우 기획취재부장
    필자가 1981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이미 '데칸쇼'는 한물간 상태였다.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전공과 상관없이 철학자 데카르트·칸트·쇼펜하우어의 책 한 권 정도는 독파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데칸쇼'라고 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뒤에 알고 보니 그런 전통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생겨난 독서 경향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전파됐고 그 후 1970년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50대 중반 이상이라면 아주 친숙한 말일 것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데칸쇼'는 좋게 말하면 낭만, 솔직히 말하면 촌스러움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철학 고전을 읽기 시작한 필자도 칸트는 대학 4학년 때, 데카르트·쇼펜하우어는 대학원에 가서 전공학도로서 의무 삼아 읽어본 정도였다. 온통 마르크스의 철학이 판을 치던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철학 책은 '철학 에세이' '세계철학사' 등이었는데 1940년대 일본의 노동자 의식화 교재를 추리거나 소련에서 펴낸 국정교과서를 적당히 편역한 수준이었다. 얼마 전 김지하 시인이 어떤 문화계의 자칭 '원로'를 질타하며 지적한 바 있듯이, 마르크스의 '자본론' '경제철학 초고' '도이치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독파한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데칸쇼'에는 낭만이나 촌스러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금 속물스럽긴 해도 데칸쇼를 읽을 경우 '근대의식으로 무장한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생겨날 수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길러주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낭만적이긴 해도 시민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공공의식이라 할 수 있다. 공공의식이 사라진 자리에 파고든 것은 혁명의식이었다. 대선 TV 토론에서 이정희라는, 지지율 1%도 안 되는 후보가 급발진 자동차처럼 굉음을 울리며 전속력 후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공공의식은 기르지 못한 채 시대착오적인 혁명의식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사회주의는 붕괴되었지만 우리 대학가에서 '데칸쇼'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생겨나지 않았다. 낭만성 혹은 촌스러움 뒤에 놓여 있는 공공성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젊은 교수들이 그 후 홉스나 로크·루소에 주목하여 최근에는 그 성과물이 책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데칸쇼'나 '철학에세이' 열풍처럼 널리 읽히지는 않는다.

    '데칸쇼'는 사람이 세상과 우주의 주인이자 주체임을 깨닫게 해주는 데 필수적인 사상이다. 특히 칸트의 경우 자연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주체('순수이성비판'),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주체('실천이성비판'), 예술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주체('판단력비판')로서 인간의 주체적인 면모를 구성해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근대의식을 갖고자 한다면 전공과 무관하게 필독해야 할 사상가다. 그후 이런 주체의식을 근대적 정치 행위의 기초가 되는 민주와 자유의 문제로 확장하려 할 경우 홉스·로크·루소·밀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대학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쏙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이 근대의식과 공공의식이다. 그런데 이들이 점점 한국 사회의 중추를 맡아가고 있다. 공공의식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이 주도하게 될 공동체의 미래는 과연 건강할 수 있을까? 대선을 앞두고 여야 없이 경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할 수 있는 배경에는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 문제를 정치의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책임 있는 공공의식이 발휘되지 않은 탓도 클 것이다. 이렇게 진단은 나왔는데 처방이 쉽지 않다. 이것이 2012년 12월 한국 지성의 온도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