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6.29 03:02
[故 박동혁 병장 부모의 '끝나지 않은 연평해전']
당시 軍수뇌부 상대 소송제기
제2연평해전 일어나기 직전
'사격' 뜻하는 북한軍 통신 감청
도발 정보 묵살되지 않았다면 北경비정을 艦艇으로 밀어내는 무모한 작전 하지 않았을 것
11년 전 오늘
박남준(57)씨와 이경진(57)씨의 아들 고(故) 박동혁 병장은 온몸에 파편 200여개가 박힌 채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실려왔다.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357 고속정의 의무병이었던 박 병장은 부상당한 전우를 돌보러 뛰어다니다 포탄 세례를 당했다. 박 병장은 80일간의 사투
끝에 결국 숨졌다. 몸속엔 미처 제거하지 못한 파편 100여개가 남은 채였다.
아들의 싸움은 끝났지만 아버지의 싸움은 작년 6월 새로 시작됐다. 박동혁 병장의 부모 등 유가족 9명은 작년 6월 제2연평해전 당시의 김동신 국방부장관, 이남신 합참의장,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 12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아들의 싸움은 끝났지만 아버지의 싸움은 작년 6월 새로 시작됐다. 박동혁 병장의 부모 등 유가족 9명은 작년 6월 제2연평해전 당시의 김동신 국방부장관, 이남신 합참의장,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 12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내용은 이렇다. 연평해전 발발 직전인 2002년 6월 13일과 27일 북한 경비정이
NLL(북방한계선)을 침범했을 때 북한군 통신을 감청하는 국군 5679부대가 14자(字), 15자짜리 북한의 도발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엔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 이후 우리 군 당국에 단 한 번도 포착된 적이 없는 민감한 위험 정보가 담겨 있었고, 이 정보에 따라 서해 5도를
지키는 해군에는 비상 경계령이 내려져야 했다.
그러나 국방부와 합참에 보고된 이 정보가 일선 부대로 하달되는 지침에서는 삭제됐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어떠한 경고도 받지 못한 참수리357 고속정은 6월 29일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평소처럼 '밀어내기'로 막아서다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시 5679 부대장이었던 한철용 예비역 육군 소장은 이 같은 내용을 폭로했다. 유족은 도발 정보가 묵살되지
않았다면 실제 공격을 목적으로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옆구리로 막아서는 위험한 작전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6명이 전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며 이 도발 정보를 누가 묵살했는지 밝혀달라고 소송을 낸 것이다.
소송 과정은 험난했다. 변호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 변호사를 찾는 데에만 수개월이 걸렸고, 재판도 지금껏 딱 두 번 열렸다. 재판 일자를 지정해달라는 요청에도 재판부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는 사이 소송을 취하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전직 해군 고위 간부는 유족들을 모아 놓고 "사실상 패전인 제2연평해전을 승전으로 해주고, 흉상까지 만들어줬는데 소송을 거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유족이 지쳐 소송을 포기했지만 박 병장 부모는 끝까지 남았다. 박씨는 "벌써 10년도 더 넘었는데 언제까지 매달려 있을 것이냐는 말도 많이 듣지만 또 다른 동혁이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꼭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소송 과정은 험난했다. 변호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 변호사를 찾는 데에만 수개월이 걸렸고, 재판도 지금껏 딱 두 번 열렸다. 재판 일자를 지정해달라는 요청에도 재판부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는 사이 소송을 취하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전직 해군 고위 간부는 유족들을 모아 놓고 "사실상 패전인 제2연평해전을 승전으로 해주고, 흉상까지 만들어줬는데 소송을 거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유족이 지쳐 소송을 포기했지만 박 병장 부모는 끝까지 남았다. 박씨는 "벌써 10년도 더 넘었는데 언제까지 매달려 있을 것이냐는 말도 많이 듣지만 또 다른 동혁이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꼭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3 > 연평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율의 시사열차] "제2 연평해전, 철저히 준비된 김정일의 복수극 (0) | 2013.06.2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