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3.26 22:50
박정훈 기획 담당 에디터 겸 부국장

산업은행이 재형저축을 유치하겠다며 인터넷으로 가입하면 금리를 0.2%포인트 더 주기로 했다. 저금리에 시달리는 고객으로선 눈이 번쩍 뜨일
희소식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금융감독원이 구두(口頭) 경고를 내리며 제동을 걸었다. 다른 은행의 금리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이유였는데,
이 보도를 보고 열 받은 분이 많을 것 같다. 대형 은행은 거래 고객을 쥐어짜 몇조원씩 이익을 내고 있다. 은행이 모처럼 쥐꼬리만 한 금리
인심을 쓰겠다는데 못 하게 막는 금감원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조직이냐고 사람들은 분개했다.
경제 기자로 취재 현장을 뛰던 시절부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한국 금융은 안방에서 큰소리치면서 왜 밖에만 나가면 맥을 못 추는 걸까. 은행들의 막대한 수익은 대부분 국내에서
금리 장사로 번 돈이다. 해외 수익은 전체의 5~6%에도 못 미친다. 글로벌 시장에선 존재감조차 없는 은행들이 국내에선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파워를 휘두른다. 예금 이자를 후려치고 대출에는 고금리를 매겨 땅 짚고 헤엄치기 식 편한 장사를 하고 있다.
금융은 한국의 주요
산업 중 '안방 장사'만 하는 유일한 분야다. 삼성전자나 현대차는 이익의 80~90%를 해외에서 벌어들인다. 전자·조선으로 대표되는 제조업은
수출 없이 성립조차 할 수 없고, 건설·유통 같은 서비스 산업도 밖에 나가 돈을 번다. 심지어 엔터테인먼트 기업들도 한류(韓流)를 만들어내
수출하고 있다. 대한민국 산업사는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운' 해외 진출의 역사였다. 금융처럼 죽어라 하고 국내 시장에만 매달리는 산업은
없었다.
금융이 본래 내수(內需) 산업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미국·유럽의 글로벌 은행들은 국외에서 버는 돈이 훨씬 더 많은
수출 기업이다. 한국 사람은 영어를 못 해 안 된다고? 우리보다 영어를 더 못 한다는 일본의 은행들도 이익의 16%(3대 은행·2011년)를
해외에서 버는데 무슨 소리인가. 한국인의 DNA가 금융과는 안 맞는다고? 피겨스케이팅도 김연아가 나오기 전까지는 한국인 체형으로 안 된다고
했었다. 요컨대 한국 금융이 수출 산업이 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금융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가 몰리는 분야다.
은행엔 명문대 출신들이 즐비하고 입사 시험은 여느 대기업보다 치열하다. 이렇게 우수한 인재를 갖고도 빌빌거리는 것이 생각할수록 미스터리지만,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에서 골목대장 노릇만 해도 먹고살 수 있도록 금융의 판이 짜여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금융정책에
'산업'의 개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관료에게 금융은 규제와 보호의 대상이고, 권력자에겐 통치 수단의 일부일 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
주변 인사들이 금융권에 줄 타 내려오고 경영진이 물갈이된다. 때만 되면 '4대 천황'이니 뭐니 하는 금융권 실세가 출현하기도 한다. 선진국 중
금융이 이렇게 정치와 엮여 외풍을 타는 나라는 우리뿐일 것이다.
은행들도 속으로는 이런 구조를 즐기고 있다.
관치(官治)·권치(權治)에 복종하는 대가로 편하게 살 길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도 묵인하는 '그들만의 담합 리그'가 이렇게 생겼다. 한
은행이 대출금리를 올리면 다른 은행도 슬그머니 따라가며 고객 등골을 빼먹는다. 선진국 은행들은 주식·채권·파생상품 같은 다양한 투자 업무로 돈을
벌지만 한국 은행들은 오로지 금리 장사뿐이다. 동네 시장통의 고리(高利) 대금업자와 다를 게 없다.
급기야 외환은행에선 전산을
조작해 중소기업 대출금리를 멋대로 빼먹은 일까지 발각됐다. 중소기업들이 영문도 모른 채 더 낸 이자는 외환은행 대주주였던 미국 론스타의 배당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에서 받아간 현금 배당은 4년간 1조7000억원에 달했다. 외환은행뿐 아니다. 주요 은행 지분의 절반 이상을
보유한 외국인 주주들이 은행에서 배당받는 돈이 매년 1조원을 넘는다. 국내 고객을 쥐어짠 돈으로 외국인 주주들 지갑을 채워준
셈이다.
IMF 사태 이후 금융회사들은 168조원의 공적 자금을 지원받았다. 국민 혈세로 연명했으면서도 국민을 상대로 금리 착취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때만 되면 임직원 성과급 잔치까지 벌인다. 골목대장 은행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봉'이다. 은행의 금리 장사에
뜯기고, 그 은행이 부실해지면 세금까지 아낌없이 갖다 바친다.
박근혜 정부의 새 금융위원장은 임기가 남은 금융 CEO라도 '국정 철학'에 따라 교체할 뜻을 밝혔다.
대한민국은 정권의 철학에 따라 은행 경영진의 목이 오가는 불가사의한 나라다. 하기야 지금 금융그룹 회장이나 은행장들도 전(前) 정권 덕에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니 임기를 못 채워도 불만은 없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대한민국 금융을 고리대금업자로 만든 공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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