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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음식)/몸에 좋은 식품

성실히 일한 내게 주는 선물 '액체로 된 빵'

성실히 일한 내게 주는 선물 '액체로 된 빵'

  • 조경란·소설가

    입력 : 2013.01.14 03:02 | 수정 : 2013.01.14 12:07

    [8] 소설가 조경란-글쓴 후 맥주 마시기
    하루 마치고 첫 모금 넘기면 입안 가득 퍼지는 삶의 의욕… 평범해서 더욱 소중한 행복
    생각만큼 글 안 써지거나 마음 불편한 날에는 '금주'

    내가 전업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은 "그럼 매일 글을 쓰세요?"라는 것이다. 글을 매일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내가 부러워하고 원하는 건 날마다 한결같은 시간에 한결같은 매수의 원고를 써내는 것이 아니라 글 쓰는 일 자체를 즐기면서 하는 작가들이다. 그것이야말로 작가에게는 궁극의 행복이 아닌가 말이다. 언제가 되면 나는 글쓰기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까. 이런 생각에 잠겨 풀죽은 채 작업실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맥주를 홀짝거린다. 한 잔 또 한 잔. 그러다 보면 이 세상에서 그래도 이것만은 별다른 기대나 조건 없이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군, 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드문 것 중에는 맥주 마시기도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사실 나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시는 타입에 속하지는 않는다. 한번은 같이 맥주를 마시던 한 지인이 "어, 모금이 꽤 크시군요!" 해서 알게 되었는데 내가 맥주를 마시는 스타일은 역시 벌컥벌컥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니까 맥주 첫 잔, 아니 서너 잔째까지는 말이다.

    일 년을 놓고 보면 나는 육 개월은 간신히 쓰고 육 개월은 빈둥거리며 지낸다. 한 달이라면 2주 쓰고 2주는 딴생각에 빠져 있다. 그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날마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맥주를 마신다. 물론 단편소설을 쓰느냐 장편소설을 쓰느냐에 따라 사정은 달라진다. 단편은 일주일 안에는 초고를 마치며 이 기간에는 맥주를 참는다. 장편은 아무래도 그 분량 때문에라도 긴 여행이 시작되는 듯해 일단 양껏 마셔둔다. 몇 달간, 원고를 끝낼 때까지는 나흘에 한 번 쉰다. 그 한 번 쉬는 날, 다음 날 지장이 없을 만큼 맥주 세 캔쯤 마시며 긴장을 풀곤 한다.

    일러스트=김현지 기자
    이렇게 글쓰기와 습관적 음주를 반복하는 셈이니 맥주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일은 없도록 늘 신경을 써야 한다. 내가 체중 관리를 하는 두 가지 이유는, 소설 쓰기는 육체노동에 가까우니까 튼튼한 몸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 가지는 마시고 싶은 만큼 평생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다. 그러니 나에게는 일일 일식반(一日 一食半·하루 한 끼반)이 적당한 듯싶다. 소설은 잘 써지는 날보다 써지지 않는 날이 훨씬 더 많다. 그래도 끈기 있게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은 이것만 해내면 시원하게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다, 라는 기다림 때문이다. 평범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랄까. 와인은 우아하고 커피는 지적이고 맥주는 친근하다. 단, 맥주를 마시지 않는 기간도 있다. 글쓰기를 전혀 못 하고 있을 때나 화가 나거나 스스로를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다행히 하루가 평온하게 지나가고 오늘 분량의 원고까지 마쳤다. 이제 냉장고 문을 열고 틈틈이 사 모은 각종 맥주 중에서 오늘의 맥주를 느긋하게 고른다. 라거나 에일, 흑맥주에 따라 일반적인 잔, 입구가 좁고 긴 잔, 크고 둥근 유리잔을 선택한다. 담백한 비스킷이나 빵이 있다면 좋지만 필수조건은 아니다. 이것 자체로 '액체 빵'이자 자연식품이니까. 맥주와 잔이 든 쟁반을 들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유리잔에 차가운 맥주를 따르기 시작한다. 황금빛, 때론 순금, 꿀, 갈색 빛깔 액체가 향기를 풍기며 쏟아진다. 웃음보다 침이 먼저 고인다. 잔의 벽에 대고 처음에는 거품 없이 천천히, 그 후부터는 거품을 내서 따른다.

    신선하고 잘 발효된 맥주일수록 이쑤시개를 수직으로 꽂아도 쉽게 내려가지 않는 단단하고 밀도 있는 거품, 치밀하고도 섬세한 거품이 생크림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자, 이제 잔을 든다. 오늘 쓴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일 다시 쓰면 되지. 이런 긍정적인 마음이 저절로 솟는다. 나에게 행복이란 다른 순간보다 조금 더 나은 그런 순간이다. 바로 지금, 일을 마친 후 맥주 첫 모금을 들이켤 때. 입안 가득 향미가 퍼져 나간다.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이 느껴진다. 보통의 나는 읽고 쓰고 마시며 산다. 형편에 비해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건 그 균형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그중 어느 것 한 가지만 빠져도 내 삶은 크게 휘청거리게 될 게 틀림없다.

    ☞조경란

    1969년 서울 출생 소설가. 여고 졸업 후 5년 동안 진학도, 취업도 하지 않은 채 서울 봉천동 자택의 옥탑방에서 홀로 책만 읽다가 26세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본격적인 ‘창작 수업’을 시작했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동네 작가상(1996)·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2)·현대문학상(2003)·동인문학상(2008)을 수상했다. 조경란의 소설은 시적인 문체로, 스토리보다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으로 현대인의 내밀한 욕망을 독특하게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