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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국회)

[아침논단] 영화 '레 미제라블'을 통해 보는 大통합

[아침논단] 영화 '레 미제라블'을 통해 보는 大통합

  • 김미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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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1.09 23:30

    관객 400만명 돌파한 열풍은 대선 이후 '48%'의 좌절 표현
    이념·계층·세대 갈등 재확인… '갈등' 꼭 부정적이지는 않아
    共感은 '차이'를 깔고 있는 것, 다른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야

    김미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모든 유행에는 이유가 있다. 작년 대선일인 12월 19일에 개봉한 영화 '레 미제라블'의 누적 관객 수가 400만명을 넘어섰다. 심지어 책에서 OST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인기몰이 중이다. 지난 6일 열린 한국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김연아가 국내 팬들에게 처음 선보인 프리스케이팅의 배경 음악도 '레 미제라블'이었다. 이 정도면 제목의 원래 의미와는 달리 전혀 불쌍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왜 이토록 '레 미제라블'이 유행일까.

    분주하게 이뤄지고 있는 해석 중 하나는 대선 패배로 이른바 '멘붕' 상태에 빠진 48%의 야권 후보 지지자들이 느낀 상실감과 그에 대한 위로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고통받는 인물들이 영화 엔딩 부분에서 함께 부르는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오늘 우리가 죽으면 다른 이들이 일어서리. 이 땅에 자유가 찾아올 때까지"라는 대사와 어우러져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마치 김연아가 전날 쇼트 프로그램에서 한 실수를 '또 다른 김연아'가 '레 미제라블'의 음악에 맞추어 멋지게 만회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인 판틴이 부르는 '나는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의 좌절이 더 오래 남는 관객은 없을까. 지난 대선 결과에서 재확인된 지역이나 이념·계층·성·세대 등의 갈등이 이런 의문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가 원작 소설의 서문에서 밝힌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는 집필 의도 또한 아직 유효한 듯하다. 꿈을 잃어버린 '레 미제라블'이라고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면 더욱 그렇다.

    2월 25일에 있을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민생' '여성'과 더불어 제시되는 중요 키워드의 하나가 '대통합'이라니 이에 반(反)하는 갈등의 뿌리나 본질은 여전히 새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일 듯하다. 통합이라는 가치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아니라 '가능한 것의 불가능성' 측면에서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무늬만 통합인 가짜 통합이 제시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거꾸로 갈등 없는 세상은 없다. 그럴 경우 갈등을 없애야 한다는 당위 자체가 억압일 수 있다. 희망도 고문이 될 수 있고, 힐링도 질병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갈등도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요즘의 핫 이슈인 세대 갈등을 예로 들어보자. 세대별로 갈린 지지자와 투표율이 주요 변수로 작용한 이번 대선 결과에서 2030 세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불공평하다며 좌절한다. 반면 5060 세대는 '술 권하는 사회'는 위험하다며 방어한다. 그러고는 다르면 틀린 것이라고 서로 경계한다. 그렇다고 이 두 세대 사이에 끼어 있는 40대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평생을 40대인 채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오히려 각 세대는 각자의 세대 감각을 차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2030 세대는 제대로 불온해야 하고, 5060 세대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흔히 갈등을 넘어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즉 '공감하는 인간'의 자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때 '공감(共感)'은 '동감(同感)'과 다르다. 동감이 '같게' 느끼는 것이라면, 공감은 '함께' 느끼는 것에 가깝다. 이 때문에 '동일성'보다는 '차이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하나인 둘'이 아니라 '둘인 둘'이 중요하기에 '단일체(單一體)'가 아니라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더 요구되는 능력이 바로 공감이다. 그러니 갈등을 잘 사용할 필요가 있다. 갈등을 조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기면서 새해 예산안을 호텔방에서 처리한 국회 예결위 의원들의 외유성 출장이 문제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투다가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는 여야 의원들보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딴 목소리'를 내는 2030 세대와 5060 세대의 갈등이 오히려 더 생산적일 수 있다. 나쁜 통합이 있다면 선한 갈등도 있다. 통합에 물어본 것을 갈등이 대답해 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면, 강하니까 갈등이다. 척력(斥力)이 강할수록 인력(引力)도 강해진다. 이것이 48%와 52%라는 다수(多數)와 다수의 갈등이 의외로 소중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