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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설2

“양극화 해소” 경제민주화 약속, 시험대에 오르다

 

한겨레|입력2012.12.20 21:20|수정2012.12.20 23:50

[한겨레]박근혜 18대 대통령


박근혜 당선인과 경제민주화 앞날

"지금은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성장잠재력을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16일 박근혜 당선인이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5대 분야 35개 실천과제로 짜인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하면서 한 말이다. 박 당선인은 경제민주화가 양극화 해소와 성장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인식을 분명히 갖고 있다. 이러한 철학은 그가 지난 2009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밝힌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경제발전의 최종 목표는 소외계층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을 하면서도 "공정한 시장"을 언급했다.

이러한 박 당선인의 인식은 '경제민주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의 영입으로 현실화됐다. 그리고 4·11총선 전 당 강령에도 "공정한 시장경제질서 확립을 통한 경제민주화 실현"이란 문구를 새겨넣기에 이르렀다.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하면서 총선에서도 승리를 일굴 수 있었다.

하지만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당선인의 인식과 의지는 의심받기 시작했다. 비록 '재회'하긴 했지만 김종인 위원장과 잠깐 동안의 '결별'은 박 당선인이 경제민주화에서 한 발짝 후퇴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공개된 경제민주화 공약에도 "국민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라는 이유로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사실상 해소) 정책과 대규모기업집단법 제정 등은 빠졌다. 경제민주화 공약은 공정거래에 방점이 찍혔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대기업의 중기 사업 영역 침해 제한) 실효성 제고 등을 약속했다. 또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재벌개혁을 위해 진보적인 경제학자나 시민사회단체가 꾸준히 요구해왔던 내용들이다. 총수 일가의 법 위반 행위에 대한 형량 강화 및 사면권 제한 등에서도 야권의 문재인 후보와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종인 위원장과 새누리당 내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 의원 등이 요구해온 기존 순환출자(A-B-C-A 등 기업간 지분 순환투자) 해소 등은 결국 제외됐다. 야당 쪽 후보와도 이 부분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박 당선인은 기존 순환출자 해소를 공약에서 뺀 이유로 "기업의 큰 혼란"을 들었다. 김 위원장이 20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기존 순환출자 해소가 인수위에서 재론될 여지가 있다고 밝혔지만, 현실화할지 불투명하다. 대신 박 당선인은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의 모순에 대해선 신규 순환출자 금지와 연기금의 의결권을 강화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힘찬경제추진단장으로서 당선인을 도왔던 김광두 서강대 명예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국민연금 의결권 강화가 되게 센 공약이다. 이를 활용하면 재벌 총수가 맘대로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해야"
이슈 선점하며 총선·대선 승리
영입 김종인 위원장과 마찰음
"국민경제 불필요한 부담 안돼"
기존 순환출자 해소등 빠져
경제민주화 후퇴하나 의구심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역설
인수위 구성 첫 가늠자 될 듯


하지만 한쪽에선 벌써부터 박근혜식 경제민주화에 대한 기대보다 한계를 우려하고 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는 "공정경쟁을 왜곡하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구조 교정 수단(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금지 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경제민주화가 중요하냐고 할 때, 박 당선인의 경제민주화엔 경제력집중 완화와 소유지배구조 개선이 희미한 것이다.

경제위기론에 밀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이 성장 전략에 우선순위를 내줄 조짐도 엿보인다. 박 당선인은 대선 전 "경제민주화와 성장은 '투 트랙'(두 가지 동시 접근)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당 안팎에서 성장에 방점을 찍는 발언으로 풀이됐다. 이에 진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당선인이) 양쪽에 다 적극적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또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약속한 수준의 경제민주화라도 실효성 있게 추진된다면 의미가 적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선인의 의지뿐만 아니라 당의 조직적 뒷받침도 중요하다.

당에서는 후보의 의지를 의심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당선인의 원칙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안종범 새누리당 의원은 "경제민주화는 다른 어떤 사안보다 당선인의 의지가 분명한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당선인도 20일 여의도 당사에서 한 당선 인사에서 경제민주화를 강조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분 없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민대통합이고, 경제민주화이고, 국민행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당선인의 의지조차 의문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는 후보 시절 텔레비전 토론에서 '경제민주화=줄푸세'란 인식을 드러냈다. 당선인이 감세와 규제완화를 상징하는 줄푸세와 경제민주화를 '짬뽕'시키면서, 그가 지금껏 얘기해온 경제민주화조차 실효성 있게 추진될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 1호 법안으로 불리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대형마트의 개점 시간 단축이 쟁점)을 총선 이후 지금까지 보류시키고 있는 것도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한 새누리당은 국회에 제출된 수십 개의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하나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진영 의장도 "당선인의 의지는 확고하지만, 국회가 실천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국회의 조력을 받지 못한다면 경제민주화는 말의 성찬에 끝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얼마나 실천할지는 당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에서부터 가늠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는 "후보가 갖고 있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와 생각을 보여주는 게 결국 어떤 사람을 경제민주화 이행을 책임질 자리에 앉히느냐에서 드러날 것이다"고 말했다.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