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신당역 비극에 절규같은 추모
스토킹 피살 추모물결 속 “강남역 사건 이후 변한 게 없다” 분노도

16일 오후 서울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 앞. ‘바뀌지 않는 시대에 남성으로서 죄송합니다. 편히 쉬세요’ ‘이래도 스토킹이 실체가 없고 경미한가요’ ‘부디 안전하고 존중받는 곳에서 행복하시기를, 같은 여자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등 시민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메모가 노랑, 분홍 등 색색의 포스트잇에 적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강남역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등의 한탄의 글을 쓴 사람도 많았다. 그 옆에 놓인 테이블에는 국화 꽃다발 50여 개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지난 14일 이 화장실에서 서울교통공사 소속 20대 여성 역무원 A(28)씨가 자신을 약 3년간 스토킹하던 전모(31)씨의 흉기에 찔려 숨졌다. 추모 공간에는 시민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날 저녁 퇴근길에 이곳을 들른 시민들은 국화꽃이 쌓인 책상 귀퉁이에 서서 메모를 써 벽면에 붙였다. 국화 꽃다발을 든 채 포스트잇 내용을 한참 들여다보며 묵념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가해자 전씨는 이날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 이날 그는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피해자에게 할 말 없느냐’는 질문에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이미 2019년 11월부터 작년 10월까지 350여 차례 피해자에게 ‘만나달라’고 연락하고 협박한 혐의,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합의해 달라’는 내용 등을 담은 메시지를 20여 차례 보내 스토킹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9년이 구형된 상태였다. 그가 A씨를 찾아가 범행을 저지른 14일은 1심 선고 하루 전날이었다.
법무부와 경찰 등은 이날 스토킹 범죄가 흉악 범죄로 이어지는 상황이 또 반복되자, 스토킹 엄벌 대책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협박과 스토킹 등으로 두 차례나 경찰에 고소를 했지만,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경찰도 적극적으로 보호 조치를 하지 않는 등 피해자 보호 시스템이 여전히 허술하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법무부는 이날 스토킹 범죄에서 ‘반의사 불벌죄’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금은 스토킹 범죄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할 경우 처벌이 불가능한데, 앞으로는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수사기관이 스토킹 가해자를 더 엄벌할 수 있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날 시민들이나 여성계에선 “진작 했어야 하는 조치”라는 반응이 잇따랐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반의사 불벌죄 조항은 가해자에게 자신의 처벌 여부가 피해자에게 달려있다는 인식을 줘서 피해자에게 계속 접근하게 한다”며 “피해자가 용서만 해주면 되는데 용서해주지 않아 자기가 처벌받는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분노를 더 키울 수 있다”고도 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피해자가 합의를 종용하는 가해자 때문에 2차 가해 내지 추가 스토킹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실제 이번 사건에서도 전씨는 A씨로부터 고소 취하를 위해 끈질기게 합의를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전씨는 올해 1월 A씨로부터 스토킹처벌법 위반으로 고소를 당한 이후에도 피해자에게 계속 합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곽아량 피해자 국선전담 변호사는 “폐지가 필요하다”면서도 “가해자로서는 어차피 합의해도 처벌을 받기 때문에 끝까지 무죄를 다투게 돼, 피해자가 원치 않게 수사기관과 법정에 증인으로 몇 번씩 나오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피해자는 빨리 사건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가해자가 계속 자기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 법적 분쟁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킹처벌법이 정한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모호한 점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층간소음으로 따지러 간 이웃을 스토킹으로 신고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반의사 불벌죄가 없어지면 경미한 사안에서 당사자들이 합의로 원만하게 해결할 여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신진희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는 “최근엔 실제 재판에서도 문제되는 행위가 ‘스토킹’ 인지 아닌지를 두고 다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