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55,600원 ▼ 400 -0.71%) 부회장과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 이사장이 함께 신개념 화장실을 개발했다는 소식이 최근 화제였다.
화장실 기술(toilet tech)은 국내에선 생소한 분야지만, 게이츠는 오랜 기간 이 분야에 투자해왔다. 게이츠는 “화장실 기술이 미래를 바꿀 것”이라고 말한다. 화장실 위생은 공중 보건의 척도이며, 선진국을 구분하는 중요 지표기도 하다. 중국과 인도가 수조원을 들여 화장실 위생 개혁에 나선 것도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기 위해서다.
화장실 위생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한국도 불과 30여년 전에는 ‘화장실이 불결한 후진국’으로 통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화장실 개선 사업을 추진했고 오랜 기간 대(對) 국민 캠페인을 진행해 지금의 화장실 문화 선진국에 올랐다.
최근에는 인분을 활용해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는 바이오 기술 개발도 활발하다. 지구의 70억 인구가 한 해에 배설하는 대·소변을 에너지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면 그 경제적 가치는 95억달러(약 13조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게이츠의 오랜 숙원 사업 해결해준 이재용 부회장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달 16일 한국을 방문한 게이츠 이사장을 만나 ‘리인벤티드 토일렛(Reinvented Toilet·화장실 재창조) 프로젝트’ 개발 결과를 공유하고 글로벌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RT 프로젝트는 게이츠재단이 저개발국을 위해 지난 2011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신개념 위생 화장실 보급 프로젝트다. 물과 하수 처리 시설이 부족한 저개발국가에는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약 9억명 이상의 사람이 야외에서 대소변을 해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수질 오염으로 매년 5세 이하의 어린이가 36만명 넘게 설사병 등으로 사망하고 있다.
게이츠 재단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1년부터 별도의 물이나 하수 처리 시설이 필요없는 신개념 화장실의 개발 및 상용화를 추진해왔다. 게이츠재단의 재정지원을 받은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 및 대학이 RT 구현을 시도했지만, 기술적 난제 및 대량 생산이 가능한 원가 수준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재단은 2018년 삼성에 RT 개발 참여를 요청했다.
게이츠재단의 RT 프로젝트를 보고받은 이 부회장은 삼성종합기술원에 기술개발을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지시했으며 게이츠 이사장과 이메일, 전화, 화상회의 등을 통해 진행 경과를 챙긴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은 3년 간의 연구개발을 거쳐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구체적인 기술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게이츠재단은 앞으로 양산을 위한 효율화 과정을 거쳐 하수시설이 없거나 열악하고 물이 부족한 저개발 국가에 이를 제공할 계획이다.
게이츠는 10여년 전 MS 회장에서 사임한 뒤 세계를 여행하다가 저개발 국가의 열악한 화장실 위생을 보고 RT 프로젝트를 구상했다고 한다. 게이츠는 2018년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화장실개선사업 박람회에서 ‘인분’이 담긴 용기를 직접 들고나와 연설해 화제를 모았다. 게이츠는 연설에서 화장실 기술이 생명을 살리고 미래를 바꾼다고 역설했다.
게이츠는 사람 배설물을 활용하는 다양한 기술을 개발 중이다. 2015년에는 사람 배설물을 물과 전기로 만드는 ‘옴니프로세서’란 기계를 개발하기도 했다. 옴니프로세서는 배설물을 1000도 이상의 온도로 태워서 순수한 수증기만을 걸러내 식수를 얻는다. 고온에 가열하는 과정에서 옴니프로세서를 가동하고도 남을 만큼의 전기도 생산된다. 배설물은 디젤이나 연료 등 에너지원으로 사용될 수 있다. 게이츠는 당시 옴니프로세서로 만든 물을 직접 마시는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 선진국의 척도 화장실 문화… 중국·인도, 수조원 투자하기도
강대국 반열에 오른 국가도 화장실 위생 개선은 난제다. 중국과 인도가 화장실 개선 사업에 수조원의 예산을 들였지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2015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를 시찰하다 농촌의 열악한 화장실을 보고 ‘화장실 혁명’을 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의 화장실은 비위생적인 것으로 악명 높았다. 수세식 화장실을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칸막이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중국 정부는 이후 재래식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개조하거나 신축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중국 내에서는 이를 ‘화장실 혁명’ 또는 ‘화장실 굴기’라고 불렀다. 이후 중국은 3년간 화장실 7만개를 개조·신축했고, 2020년까지 추가로 화장실 6만4000개를 지었다. 중국 관광분야 담당인 국가여유국이 2015년부터 3년 동안 화장실 7만여개를 만드는 데 쓴 돈은 200억위안(약 3조9500억원)에 달한다.
수조원의 예산을 들였지만 중국의 화장실 혁명은 사실상 실패한 정책에 가깝다는 것이 현지 언론의 평가다. 중국 언론들은 정부가 농촌 지역에 8만개 이상의 화장실을 만들었지만 설계 문제나 부실 공사로 5만여개가 방치됐다고 보도했다. 현지 언론은 정책 실패의 원인으로 형식주의를 꼽았다. 지방 정부가 화장실 현대화 목표치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도 화장실을 만들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화장실 개혁이 ‘슬픈 프로젝트’가 됐다며,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곳에 수세식 화장실만 설치돼있는 사진을 보도하기도 했다.

인도는 2014년 10월부터 ‘클린 인디아(Swachh Bharat Mission, SBM, Clean India)’를 정책을 시행하고 수도권과 지방 4043개 도시를 대상으로 화장실 위생을 개선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인도 정부는 클린 인디아 착수 첫해 262억5000만 루피(한화 약 4094억원) 수준의 예산을 배정했으나, 2단계 사업에는 1조4088억8000만루피(한화 약 22조원)를 책정하고 사업을 확장했다.
인도는 인구 13억명 중 3억명 이상이 야외에서 배변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수질 오염과 각종 질병의 창궐 원인이 됐다. 인도 정부는 화장실을 새로 짓는 빈곤 가정에 1만2000루피(20만원)를 지원해주는 등 전국에 1억개가 넘는 화장실을 보급했다. 또 화장실을 사용하면 용돈을 주거나 야외에서 용변보는 이를 발견하면 호루라기를 부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노천 용변 문화를 퇴치했다. 클린 인디아 사업으로 인도 화장실 위생이 대폭 개선됐지만, 여전히 인구의 19%는 화장실이 없는 집에 살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 사람 배설물로 가는 자동차... 바이오 에너지로 떠오르는 인분
화장실 테크는 인분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UN 싱크탱크인 UN대학 물·환경·보건연구소(UNU-INWEH)에 따르면 지구의 70억 인구가 한 해에 배설하는 대·소변을 에너지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면 그 경제적 가치는 95억달러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사람의 대변은 55~75%가 물이고 나머지 25~45%에 메탄가스가 포함돼있다. 이를 말려 응축하면 석탄과 비슷한 성분의 에너지원이 된다. 95억달러는 1억3800만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위생시설을 전혀 갖추지 않은 인구 10억명이 생산하는 배설물의 메탄가스 가치만 따져도 연 3억7600만달러에 이른다. 이는 산업현장에서 석탄 850만톤(t)을 때는 것과 비슷한 가치다.
영국에서는 인간의 배설물 등을 섭씨 250도로 끓인 뒤 압축해 고체로 만든 바이오 연료를 활용한 기차가 개발됐다. 연소 시 일반 석탄에 비해 대기 오염 물질이 확연히 적게 배출된다고 한다. 호주에선 인간 배설물을 전기로 만들어 전기차를 충전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DC는 인간 배설물을 고열로 가열해 압축한 뒤 비료로 만들어 비영리단체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