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공 5개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러시아의 ‘경제 맷집’ [WEEKLY BIZ]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진영으로부터 전방위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가 최악의 여건에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풍부한 천연 자원을 앞세워 경상수지는 대규모 흑자 행진 중이고, 루블화 가치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 국제적 고립 속에 러시아가 수개월 내 ‘백기(白旗)’를 들 것으로 봤던 서방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러시아 경제가 일단 ‘버티기’에 성공하는 모습이지만, 제재가 길어질수록 산업 격차가 벌어지고 민생이 파탄에 이르면서 회복이 어려운 ‘침체의 늪’에 빠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 사태 발발 4개월을 넘긴 시점에서 러시아 경제가 처한 현실을 WEEKLY BIZ가 짚어봤다.

◇제재에도 고공행진하는 루블화
최근 금융시장에서는 예상과 반대로 움직이는 러시아 루블화 환율이 초미의 관심사다. 물 샐 틈 없는 대러시아 제재와 러시아 신용등급 강등, 디폴트(채무불이행) 등 온갖 악재에도 루블화 환율이 가파른 하락세(루블화 가치 상승)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기준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은 54.5루블로 지난 4개월 사이 3분의 1 가까이(139→54.5루블) 떨어졌다. 루블화 환율이 50루블대까지 떨어진 것은 지난 2018년 4월 이후 4년 2개월 만에 처음이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2주간 루블화 환율이 공포감에 76.4%나 급등(78.8→139루블)했던 것과 판이하게 다른 흐름이다.
루블화 환율의 대반전을 일군 것은 경상수지 흑자와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금융 통제 정책이다. 러시아 중앙은행(BOR)에 따르면 올해 1~5월 러시아의 경상수지는 1103억달러 흑자로 작년 같은 기간 대비 3.4배나 늘었다. 전체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원유와 가스 가격이 올 들어 5개월간 각각 53.3%(배럴당 71.5→109.6달러), 118.2%(MMBTU당 3.73→8.14달러)나 상승한 영향이 컸다.
전쟁 직후 기준금리를 연 9.5%에서 20%까지 높이고, 자국 내 외화 송금을 막으면서 루블화 가치 하락을 적극 방어한 것도 효과를 봤다. 또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퇴출되자 발 빠르게 우회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새로운 무역 길을 개척하며 피해를 최소화했다. 지난 3월 수출 업체들이 매출의 80%에 해당하는 외화를 의무적으로 루블화로 환전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해외 기업에 천연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지불할 것을 요구한 것도 환율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했다.

◇러시아 경제, ‘버티기’ 달인
루블화 가치 급등은 아무리 강력한 제재에도 러시아 경제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최근 러시아가 디폴트를 맞은 것도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러시아로부터 외화 표시 국채에 대한 이자를 받은 금융기관들이 이를 투자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해 빚어진 일이다. 국제금융협회(IIF) 엘리나 리바코바 수석연구원은 “러시아의 금융 시스템은 몇 주간의 뱅크런 이후 일상을 회복했다”며 “자금줄을 죄면 전쟁이 멈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순진했던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는 크름반도를 강제 병합한 2014년보다 낮은 수위의 제재를 경험하며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초강력 제재에 대비해 경제 ‘맷집’을 키우는 데 주력해왔다. 공공 부문 및 금융시장의 건전성 확보를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외환 보유고의 다변화를 통해 가용 재원을 분산하면서 대외 리스크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팬데믹 이전 5년(2015~2019년)간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평균 12.6%밖에 되지 않는다. 팬데믹으로 보조금 지출이 늘면서 부채 비율이 작년에는 18.2%까지 올라갔지만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부채 비율이 140~150%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매우 낮다. 외환 보유고도 작년 말 기준 6306억달러로 세계 5위권이어서 대외 부채 대비 충분한 규모로 평가된다. 특히 2013년 외환 보유고의 절반이 넘던 미국 달러화 비율을 16.4%(작년 6월 기준)까지 낮추고, 8~9% 수준이던 금 보유량을 21.7%까지 늘려 특정 외화 의존도를 낮췄다.



러시아 기업들도 제재에 점차 적응하고 있다. 제재 대상이 아닌 지방·소형 은행 계좌로 대금 결제를 하고, 달러 대신 루블화·위안화 등 대체 통화를 이용하는 식이다. 중국·벨라루스 등 우호국 사무소를 통해 대금을 받는 방법도 성행하고 있다. 제재로 막힌 발트해·흑해 항구 대신 러시아 내륙 철도와 극동 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항을 활용하는 등의 대체 경로도 발굴되고 있다.
러시아 기업가 권리보호연구소가 최근 6003개 러시아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86.8%가 제재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으나 이 중 77.4%는 “이미 새로운 상황에 적응했거나 적응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신환종 NH투자증권 FICC(채권·외환·파생상품) 리서치센터장은 “경제 파탄으로 물가 상승률이 2000%에 달하고 영아 사망률이 나이지리아와 비슷했던 1990년대에 비하면 지금은 상황이 한결 나은 편이라 러시아인들도 푸틴 대통령을 믿고 현 상황을 감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
러시아가 ‘버티기’에 최적화된 사회·경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느냐다. 수입에 제동이 걸리면서 내부적으로는 벌써부터 주요 물자 부족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러시아 자동차업체 아프토바스는 최근 국민차 ‘라다’의 올해 모델을 출시했는데 이 차는 에어백이나 잠김방지 제동장치(ABS) 등 가장 기본적인 기능도 갖추지 못했다. 서방 제재로 차량용 부품 수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매크로 어드바이저리’의 크리스 웨퍼 공동설립자는 “미래의 러시아인이 라다를 몰 때 서구인들은 무인 자동차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식품 포장지도 라벨 없이 인쇄해야 하고, 의류 업체는 셔츠용 단추 조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가 상승률은 20%까지 치솟았고, 올해 국내총생산(GDP)은 10%가량 역(逆)성장할 전망이다. 1998년 모라토리엄(채무 지불 유예) 선언 당시 성장률이 -5.3%였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 타격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 내에서도 점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러시아 최대은행 스베르방크의 게르만 그레프 대표는 “러시아 경제가 2021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10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예브게니 곤트마커는 “휴전이 된다 해도 러시아는 계속 ‘포위된 요새’ 현상에 직면할 것”이라며 “러시아 경제는 더욱 원시적으로 변하고, 군수물자 생산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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