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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1.30 23:09
옛 문제 옛 방식으로 씨름하면 나라 후퇴
떠나야 할 사람 떠나고 대통령 一新의 자세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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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논설고문
나라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나라의 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터져 나온다. 하루 이틀 만에 심지어는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뒤집히는 정책이 한둘이 아니다. 일일이 꼽으려면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다. 하도 쉽게 뒤집으니 또 한 번 뒤집히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여당이 야당보다 더 자주 정부안(案)을 뒤집고, 정부는 여당을 가리켜 '여당인지 야당인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흘리니 한솥밥 먹는 남남과 다를 게 없다. 이 마당에 뿌리를 같이하는 전(前) 대통령 회고록 파문이 세상을 더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하필이면 왜 지금 전·현직 간의 감정적 앙금과 대북정책과 대중국 외교에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내놔야 했는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대통령 간의 소통 부재(不在)에는 혀를 차고 있다.
문제없는 나라는 없다. '앞으로 가는 나라' '제자리걸음하는 나라' '후퇴하는 나라'를 가르는 건 문제의 유무(有無)가 아니라 문제의 성격 차이다. 늘 새로운 문제와 씨름하며 없던 길을 뚫어가는 나라는 전진하는 나라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문제를 안고 끙끙대는 나라는 제자리걸음하는 나라다. 벌써 해결했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쥐었어야 할 문제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 나라는 후퇴하는 나라다. 대한민국을 '속도의 나라'라고 부르던 건 옛일이 됐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씀이 배부른 소리로 들릴 정도로 속도를 잃었다. 실속(失速) 사회다. 우리는 옛 문제를 붙들고 옛 방식으로 출입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답답한 나라에 살고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문제·청년 실업과 노인 빈곤 문제·공무원 연금과 건강보험 적자 누적 문제·출생률 감소와 인구의 급속한 노령화 문제·부실한 영유아 보육 문제·중산층의 하류화(下流化)와 양극화 문제·잠재성장률의 지속적 하락(下落) 문제·복지와 증세(增稅) 논쟁·전면 무료 급식의 타당성 문제·부실(不實)대학 퇴출(退出)과 교육 개혁을 통한 사(私)교육비 경감(輕減) 문제…. 우리 사회가 당면한 이 무수한 문제 가운데 작년·올해 갑자기 튀어나온 문제는 하나도 없다. 문제집의 겉표지가 닳아버렸을 만큼 묵은 문제들이다.
원인도 해결책도 찾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다 같이 끙끙 앓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다. 해결책은 있으나 실행하는 데 마찰과 희생이 따르는 문제도 있다. 앞서간 나라들이 고민하다 정부와 이익집단 간의 대타협을 통해 넘어섰던 문제들이다. 우리가 결단하고 행동하는 데 따라 언제든지 풀 수 있는 문제도 상당수다. 이 문제들을 난이도(難易度)에 따라 분류해 '매듭 끊기 식(式)의 전면적 해결'과 '매듭 풀기 식의 점진적 해결' 가운데 어느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두 방식을 절충해서 적용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건 정치 주체(主體)의 소임(所任)이다.
정권마다 하고 싶은 일·할 수 있는 일·해야 할 일의 순서(順序)가 달라진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하는 것은 권력자가 자기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국민이 하고 싶은 일·나라가 해야 할 일을 풀어보라는 권한 위임(委任)이다. 당면한 문제의 성격을 잘못 판단하거나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앞세우려 하면 제자리걸음하고 때로는 후퇴하는 법이다.
대통령은 한 달 있으면 취임 3년을 맞는다. 국민 지지도는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취임 무렵의 '하고 싶었던 일' '해야 할 일''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적잖이 착잡할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여기까지 이르는 것은 대통령의 국정 스타일 특히 사람을 쓰고 내보내는 용인(用人)의 방식에 대한 국민 불만이 쌓이고 그것이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그릇되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위험한 직업이다. 미국에는 대통령을 고층 빌딩의 유리를 닦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국민 지지도라는 외줄에 매달려 오르내리는 모습이 그만큼 위태로워 보인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몇백개 선거 공약을 붙들고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처지가 못 된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두세개 과제에 전력을 다하는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다. 5년 단임(單任) 대통령의 3년 차라는 생각에 쫓기면 마음만 다급해진다. 4년 단임 대통령의 2년 차로 받아들이면 무엇이 필요한지 더 또렷이 보일 수도 있다. 미국에선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호황(好況)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인기 없던 증세(增稅) 덕을 봤다고 한다. 메르켈 총리의 독일도 전임자 슈뢰더 총리의 단기(短期) 효과보다 중기(中期)와 장기(長期)를 내다본 정책이 없었더라면 처지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는 어렵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건 일신(一新)의 자세다.
대통령을 둘러싼 사람들도 생각할 일이 있다. 대통령이 붙든다고 다시 주저앉거나 의자만 바꿔 앉는 건 우리 청와대 용어로는 불충(不忠)에 해당한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충(忠)의 기본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