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26 03:00
최근 연말정산을 둘러싼 소동의 근본 원인은 정치권과 정부가 '증세(增稅) 없는 복지'를 밀어붙인 데 있다. 2012년 대선 때 여야는 한편으론 경쟁적으로 장밋빛 복지 공약을 쏟아내면서 다른 한편으론 국민의 세금 부담이 늘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모순된 약속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공약 이행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 세금부터 거둘 생각을 말라"며 증세론이 거론되지 않도록 미리 못을 박았다.
정부는 증세 없는 복지를 위한 구체적인 재원(財源) 마련 방안으로 '공약 가계부'를 내놨다. 비과세·감면 정비로 18조원, 지하경제 양성화로 27조원, 세출 구조조정을 통해 84조원의 재원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세율을 올리거나 새로운 세금을 만들지 않고 대통령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공약 가계부의 계획은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SOC·산업·농림 분야에서 작년과 올해 2년 동안 8조7000억원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실제 예산은 오히려 4조9000억원 늘어났다.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지출을 대폭 늘리면서 특정 분야 예산을 깎을 수 없었고 이해관계자들의 저항도 컸기 때문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 증대도 성과가 없고, 비과세·감면 축소 역시 납세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다.
반면 복지 공약은 일부 조정을 거쳐 대부분 약속대로 시행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최대 20만원의 기초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고, 0~5세 아이를 위한 무상 보육, 초·중·고 학생을 위한 무상 급식, 대학생을 위한 반값 등록금 등의 정책이 잇따라 도입·확대됐다. 기초연금·무상 보육·무상 급식·반값 등록금에 들어가는 예산은 2012년 14조원에서 올해 27조원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공약 가계부의 재원 마련 계획은 부도(不渡)가 났는데 지출만 예정대로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돌봄 교실이 예산 부족으로 유명무실해지고, 노후(老朽) 학교 시설에 대한 개선은 미뤄졌다. 정부 지원이 절실한 다른 복지·안전 예산이 희생되고 있다. 지자체와 교육청들은 급증하는 무상 복지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매년 하반기가 되면 연례 행사처럼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다 경기 침체로 인한 세수 차질까지 겹쳤다. 2013년 8조5000억원, 작년 11조1000억원에 이어 올해도 수조원의 세수 부족이 예상된다.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복지 재원을 마련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정부는 세수 결손(缺損)을 메우기 위해 담뱃값·주민세·자동차세 인상 등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결국 '꼼수 증세'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연말정산 세금 폭탄 소란도 여기서 비롯된 일이다.
준비 안 된 복지 확대의 또 다른 부작용도 있다. 무상 보육 실시로 전업(專業)주부들도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대신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기 시작하면서 어린이집 부족으로 큰 혼란이 있었다. 이후 어린이집이 갑자기 늘어나자 부족한 보육 교사를 충원하기 위해 자격 요건을 완화했고, 아동 학대 문제가 터져나오는 식으로 후유증이 꼬리를 물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는 이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없이 미봉책만 내놓으며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연말정산과 관련해 월급쟁이들의 불만이 들끓자 새누리당과 정부는 세금 공제를 확대해 소급(遡及) 적용하겠다고 했다. 어린이집 문제에 대해서는 집에서 아이를 키울 때 지급하는 양육수당을 늘리겠다고 했다. 급격한 복지 확대에 따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면서도 세수는 줄이고 지출은 더 늘리겠다며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국민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책을 펴다가는 그리스·이탈리아 같은 남유럽 국가들처럼 재정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번 연말정산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비과세·감면을 줄이는 것조차 쉽지 않다면 우선 복지 지출을 억제할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노인 빈곤율에 맞춰 기초연금 수혜 대상을 현재의 70%에서 50%로 줄이기만 해도 올해 관련 예산을 3조원 가까이 줄일 수 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똑같은 혜택을 받는 보편적 복지, 무차별 복지가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맞춤형 복지, 집중적 복지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우리 복지와 재정의 현실을 국민에게 정확하게 밝히고 복지 구조조정에 대한 이해를 구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진심 어린 사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로 인해 앞으로 복지 지출이 가파르게 증가하게 되고, 그래서 국민의 세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국민들도 증세 없는 복지의 환상(幻想)에서 깨어나야 한다. 복지 확대의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누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받아들일 때가 됐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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