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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蹟(기적)의 배'를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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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수웅
- 문화부 차장
- E-mail : jan10@chosun.com
- 문화부 기자가 되고 싶어 1995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문..
- 문화부 기자가 되고 싶어 1995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문학, 영화, 출판, 여행 담당으로 주로 일했다. 문화 현상과 트렌드를 분석한 '인기 해부학', 영화 칼럼 '촉촉한 시선', 예인과 문인의 서가를 찾아간 '나의 글 나의 서가', 파워라이터와의 대담인 '북앤수다' 등의 기획 시리즈· 기명 칼럼을 연재했고, 연재 중이다. 석학 움베르토 에코와의 파리 현지 인터뷰, 소설가 김훈과의 스페인 산티아고 자전거 기행, 암 투병 중인 소설가 최인호 인터뷰를 독자에게 전달하며 얻은 보람이 크다.
KBS라디오 '황정민의 FM대행진', TV조선 '어수웅의 문화오디세이' '북잇(it)수다' 출연 및 진행. 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있다. 고전 읽기의 쾌락을 다룬 책《파워 클래식》을 기획하고 해설을 썼다. 문화야말로 마음과 몸을 확장하는 가장 지혜로운 소비이자 투자라고 믿으며,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자는 욕심으로 텍스트를 읽고 사람들을 만나며 기사를 쓴다.
입력 : 2015.01.01 03:03
- 어수웅 문화부 차장
미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였던 빌 길버트가 쓴 이 책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을 다룬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1만 4000명의 피란민을 구한 화물선이다.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그 배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2004년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안재철 편역·자운각 펴냄)라는 이름으로 번역됐다.
절판된 책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생략한다.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검색되지 않았고 수소문 끝에 경기도 고양시 국방대 도서관에서 겨우 한 권을 발견했다.
'기적의 배'가 알려준 기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적으로 꽤 많이 알려진 기적. 원래 화물 전용이었던 메러디스호는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에서 화물을 버리고 피란민을 태웠다는 것이다. 물도 음식도 화장실도 의사도 통역관도 없는 배는 혹독한 동해 바다의 겨울 추위를 체온으로 녹이며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 3일 동안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또 하나는 처음 알게 된 기적이다. 메러디스호의 선장은 휴전 한 해 뒤인 1954년 가톨릭 수도자가 됐다. 그의 이름은 마리너스 라루(1914~2001). 미국 뉴저지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에서 종신서원한 뒤 평생 수도원 밖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가톨릭 수도사 감소와 재정난으로 뉴튼수도원은 문 닫을 위기에 처했고, 결국 스스로 독일의 베네딕도회 지도부에 공동체 해체를 요청했다. 이번에는 다시 반전(反轉)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경상북도 칠곡 왜관수도원에서 지원을 결정한 것이다. 보은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50년 전 자신의 결단이 이렇게 돌아올 줄 선장은 알았을까. 이 결정 이틀 뒤인 2001년 10월 14일 마리너스 수사는 세상을 떠났다. 뉴튼수도원은 지금도 왜관수도원에서 운영 중이다.
이 글은 신(神)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증명이 목적이 아니다. 진영 논리에 따라 '국제시장'에 대해 엉뚱한 소리를 앞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지지나 비판도 아니다. 단지 인간에 대한 어떤 예의와 반세기 만에 다른 방식으로 그 예의를 갚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억되었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알게 된 사실 하나를 기록해 둬야 할 것 같다. 이름과 대출 날짜를 적는 표지 뒤쪽의 흰색 대출카드는 연필 흔적 하나 없이 빳빳했다. 10년 전에 나온 책인데도 새 책 같았다.
새해 첫날이다. 부디 지금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리너스가 들인 시간·노력·정성·성의를 잊지 않기를. 그리고 그 선장에게 경의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지금 우리의 능력과 자부심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