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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박전국세청고위직찌라시보고]/[알베르까뮈] 이방인,불륜,혼인관계

평생 불륜과 혼외관계를 이어간 '부조리한 이방인' 알베르 까뮈

  • 평생 불륜과 혼외관계를 이어간 '부조리한 이방인' 알베르 까뮈

  • 문갑식 블로그
    편집국
    E-mail : gsmoon@chosun.com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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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05 17:32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는 길을 석달 만에 달리고 있습니다. 지난 8월 처음 갔을 때는 무더위로 땀을 뻘뻘 흘린 기억밖에 없는데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강렬한 태양에 전체가 노랗게 물든 것 같은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가까운 아비뇽에 이틀을 묵을 요량입니다. 유수(幽囚)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해준 아비뇽 교황청의 위압적인 자태며 론강을 가르다 뚝 끊어진 성(聖) 베네체다리에 다시 올라 허무한 세월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뭐랄까, 사람과 하늘이 함께 녹아버릴 듯이 다같이 들뜬 분위기, 이제는 사진 속에만 남아 멈춰버린 풍광이 오라고, 다시 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보르도에서 5시간 차를 몰아 프로방스 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엑상프로방스는 남부 알프코트다쥐르주(洲), 즉 레지옹(Region-우리의 道)의 주요 도시입니다. 아래쪽 코트다쥐르는 지중해 쪽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해변을 일컫는 말이지요. 흔히 프랑스령(領) 리비에라라고도 합니다. 코트다쥐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뤼브롱산맥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의 배경이 되는 산군(山群)이 동서로 달리며 이 지방을 장벽처럼 감쌉니다. 다른 명소가 론강(江)이지요.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의 정신병원에 머물 때 그렸던 ‘별이 빛나는 밤’의 무대가 됐습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니스로 달리는 7번 국도에 우뚝 솟아있는 생투빅투아르. 뭔가 돌무더기 안에 로맨스가 싹틀 것 같은 느낌을 준다./사진=이서현
엑상프로방스에서 니스로 달리는 7번 국도에 우뚝 솟아있는 생투빅투아르. 뭔가 돌무더기 안에 로맨스가 싹틀 것 같은 느낌을 준다./사진=이서현

이것이 뤼브롱 산맥이다. 뤼브롱은 대-소 산맥이 루르말랭 협곡을 싸고 달린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등장하는 무대이기도 하다./사진=이서현
이것이 뤼브롱 산맥이다. 뤼브롱은 대-소 산맥이 루르말랭 협곡을 싸고 달린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등장하는 무대이기도 하다./사진=이서현
뤼브롱산맥, 론강과 함께 코트다쥐르를 상징하는 것이 ‘미스트랄(Mistral)’입니다. 이탈리아 알프스에서 발원해 아비뇽-아를-지중해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겨울부터 봄까지 부는 차가운 북서풍을 이렇게 부릅니다. 영국 작가 피터 메일은 ‘프로방스에서의 1년’이라는 책을 통해 미스트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미스트랄의 위력을 프랑스인 특유의 과장이라고 콧방귀를 뀐 적이 있다. 그런데 24시간만에 기온이 20도나 떨어지고….”
여기에 지중해쪽 온기까지 남쪽에서 밀려오니 변화무쌍하겠지요. 사람들은 니스-칸느-몬테카를로-이탈리아 산레모로 이어지는 해변을 떠올리지만 예술가들에겐 산과 바람과 바다가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아비뇽에서 1시간 거리에 루르말랭(Lourmarin)이란, 인구가 1000명 남짓한 동네가 있습니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지요. 여기서 살던 카뮈는 파리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루르말랭 마을의 전경. 앞에 솟은 시프레 나무가 화살같은 느낌을 준다. 시프레 나무는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가로수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 마을의 전경. 앞에 솟은 시프레 나무가 화살같은 느낌을 준다. 시프레 나무는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가로수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 마을 초입에 있는 분수와 피잣집.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카뮈의 집이 나온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 마을 초입에 있는 분수와 피잣집.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카뮈의 집이 나온다./사진=이서현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은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이 나라를 지배하는 두 정부가 있다. 프랑스 중앙은행과 갈리마르 출판사다.”
1911년 창립돼 100년이 넘은 이 지성의 산실에서 나온 통계가 있습니다. 프랑스 최대의 베스트셀러 겸 스테디셀러를 집계해보니

 

2위가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베리(2600만부), 3위가 장 폴 사르트르(2100만부)였다는 겁니다. 그럼 1위는 누구일까요? 바로 알베르 카뮈(2900만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카뮈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주아브 보병연대에 근무하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 출신으로 문맹(文盲)에 고아였습니다. 카뮈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지요. 아버지는 그가 한살 때 제1차 세계대전 중 마른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할머니, 어머니, 형, 두명의 외삼촌과 알제리에서 살던 카뮈는 1923년 프랑스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어머니가 ‘하녀(下女)’라는 사실에 고민합니다. 알제리대학을 폐결핵으로 중퇴했고 고학(苦學)하면서 가정교사-자동차수리공-기상청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멋쟁이여서 명배우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됐고 골키퍼를 할만큼 축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카뮈는 방랑했습니다.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프랑스 공산당원이 됐고 알제리 공산당에도 가입했습니다. 훗날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제명당한 뒤 공산당의 교조주의를 비난하긴 했지만.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했지요. 시몬 이에와 1934년 결혼했지만 서로의 불륜으로 상처받다 이에가 모르핀에 중독되자 6년 만에 이혼합니다.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와 재혼하지만 아내는 상처만 받습니다. 1945년 쌍둥이 카트린(여)과 잔(남)을 낳았는데도 카뮈는 혼외관계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상대 가운데에는 스페인의 유명 여배우 마리아 카자레스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문학에서 입지를 다진 계기가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군입대를 결심했으나 폐결핵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카뮈는 레지스탕스 조직 ‘콤바’에 가담해 지하신문을 통해 항독(抗獨)의 필치를 휘두릅니다. 이 기간 사르트르와 교제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를 놓고 소원해지지요. 아시다시피 사르트르는 공산주의를 흠모했지만 그 실체를 이미 안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책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카뮈가 쓴 명작 ‘이방인’(1942년) ‘페스트’(1947년)’ ‘시지프신화’(1942년) ‘전락’(1956년)은 전쟁의 전후(前後) 암울했던 시대상황이 낳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징처럼 된 부조리(不條理)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부조리를 이야기하다보면 우리는 또다시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요. 이런 말도 남깁니다. “우리는 삶과 존재가 위대해지길 바란다. 동시에 우리가 언젠가 죽을 것을,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도 알고 있다.”

이중적이며 이원적으로 살아온 식민지 출신 작가를 파리의 사회는 경원(敬遠)하지요. 그는 ‘도피처’를 찾습니다. 1946년 카뮈는 처음 보클뤼즈를 찾지요. 아비뇽이 주도(州都)로, 알프코트다쥐르 옆 레지옹이었습니다. 카뮈는 보클뤼즈에서 고향 알제리를 떠올렸고 ‘늘 무엇인가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파리의 지식인 사회를 떠나고 싶어’ 그곳에 시골집을 얻습니다. 친구였던 시인 르네 샤르가 도움을 줬지요.
정면에 보이는 카페가 루르말랭 초입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아침은 이런 카페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시작된다./사진=이서현
정면에 보이는 카페가 루르말랭 초입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아침은 이런 카페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시작된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의 대표적인 레스토랑 거리.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어울려 이 작은 마을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의 대표적인 레스토랑 거리.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어울려 이 작은 마을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사진=이서현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는 명성과 함께 ‘부(富)’도 얻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밝고 한적한 집필 환경을 찾지요. 처음 떠올린 곳이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이었지만 프랑코 총통 독재 치하여서 꺼림칙했습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도 생각했지만 문학과 평론의 기반 파리를 떠날 순 없었지요. 그에게 루르말랭을 권한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의 스승인 철학자 장 그르니에입니다. 1958년 9월25일 카뮈는 그르니에에게 편지를 씁니다.
“저도 선생님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은 거지요. 곰곰히 생각한 끝에 이 참한 집을 샀습니다.”
그가 말한 참한 집이 루르말랭 골목 언덕으로 이어지는 외과의사 올리빙 모노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가격 930만 프랑. 카뮈는 루르말랭의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1958년 8월31일 작가수첩에는 “뤼베롱쪽 전망이 아름다운 셋집을 돌아본다. 세찬 빛, 광대무변한 공간이 나를 흥분시킨다. 드디어 좀 정착을 해보고 싶다….”

그해 10월 집을 산 이후 처음 혼자 루르말랭으로 돌아오면서는 이런 글도 남기지요.
“나는 건조하고 싸늘한 미스트랄 바람 속에서 밤기차를 타고 와 내렸다. 반짝이는 햇빛 속에서 하루종일 기분좋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 전신(全身)에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텅빈 집에 붉은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것을 바라본다. 미스트랄 바람.”

루르말랭에서 카뮈의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동네 어귀 무료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50여 미터를 걸어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맨 왼쪽이 카뮈의 집으로 가는 언덕, 그 끝에는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가운데로 가는 길은 중심부 작은 광장으로 카페들이 늘어서 있지요. 세명에게 물었는데 할머니와 청소부는 곧장 카뮈의 집을 손으로 가리킵니다. 한 중년 여성은 “딸이 살고 있다는데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곳이 카뮈의 집이다. 딸이 살고 있다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사진=이서현
이곳이 카뮈의 집이다. 딸이 살고 있다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사진=이서현

정면에 보이는 집이 카뮈가 살던 곳이다. 대문에 붉은색 표시를 해놓은 것이 마치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사진=이서현
정면에 보이는 집이 카뮈가 살던 곳이다. 대문에 붉은색 표시를 해놓은 것이 마치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사진=이서현
카뮈의 집은 그리 지형이 좋다고 볼 순 없습니다. 정면에서 보이는 문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굳게 닫혀있었지만 기계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고 측면 쪽 정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몇번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지요. 아마도 무작정 찾아와 두드리는 ‘카뮈 순례자’가 많았을 겁니다. 언뜻 창(窓)틈으로 두툼한 책들이 보였습니다. 정면 쪽 문에 붉은 원에 대각선으로 쭉 그은 선이 마치 ‘성가시게 굴지마세요’라고 외치는듯 했습니다.

카뮈가 살던 루르말랭은 작지만 정이 넘치는 동네였습니다. 장이 열려 구경해보니 흥정이 요란했지요. 특이하게도 남자도 여자도 밀짚인지 갈대 비슷한 것으로 만든 가방을 들고 있습니다. 치즈며 과일도 풍성했고…. 카페와 식당은 점심나절 한껏 흥청대더니 오후 2시가 넘자 정적(靜寂)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가까워서 그런지 시에스타를 즐기러 모두 집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거길 헤매는 두 이방인.
특이하게도 루르말랭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간에 사진에 보이는 밀짚가방을 꼭 하나씩 들고 다녔다./사진=이서현
특이하게도 루르말랭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간에 사진에 보이는 밀짚가방을 꼭 하나씩 들고 다녔다./사진=이서현

가장 소란한 곳은 역시 야채상이다. 가운데 빨간 옷 입은 상인이 온갖 농담을 다해가며 채소를 팔고 있다./사진=이서현
가장 소란한 곳은 역시 야채상이다. 가운데 빨간 옷 입은 상인이 온갖 농담을 다해가며 채소를 팔고 있다./사진=이서현

사진에 보이는 것은 양으로 만든 고트 치즈다. 가운데 치즈 위에 양의 얼굴을 앙증맞게 올려 놓았다./사진=이서현
사진에 보이는 것은 양으로 만든 고트 치즈다. 가운데 치즈 위에 양의 얼굴을 앙증맞게 올려 놓았다./사진=이서현

1960년 1월3일 카뮈는 마지막 길을 떠납니다. 원래 열차로 아내, 아이들과 함께 파리로 가려했지만 마음을 바꿔 친구 미셀 갈리마르 부부의 승용차를 타고 가기로 했지요. 음울한 전조(前兆)는 며칠 전부터 있었습니다. 1959년 연말 카뮈는 느닷없이 아내에게 “만약 내가 죽으면 루르말랭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에 앞서 알제리의 어머니에게 수표를 넣은 편지를 보냅니다.
“엄마가 언제나 변함없이 젊고 아름답기를 바라요.”
마지막 날 카뮈가 들고간 검은색 가방에는 훗날 발간되는 소설 ‘최초의 인간’ 원고와 일기, 니체의 ‘즐거운 학문’, 세익스피어의 ‘오셀로’, 신문에서 오려낸 운세(運勢), 그리고 소용없게 된 기차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운세는 “불후의 명작을 1960년과 1965년 사이에 쓰게 된다”고 예언됐다지요. 다음날 카뮈가 탄 차는 안개 때문에 미끄러져 가로수를 두번 들이받습니다. 카뮈는 뒷문으로 튕겨나가 즉사하지요.

1월5일, 카뮈는 관(棺)속에 누워 그렇게도 사랑했던 루르말랭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묘는 마을 맞은편 공동묘지에 있었습니다. 아무 글귀없는 표석에 알베르 카뮈(1913~1960)라고만 새겨져 더 눈을 끌더군요. 그의 사후 가족은 카뮈가 그랬듯 우울한 삶을 이어갑니다. 마담 카뮈, 즉 카뮈의 부인은 정신병을 앓는 아들 장을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 뒤 아파트에서 평생 돌보다 지금 루르말랭에 있는 카뮈의 묘 곁에 누워있습니다.
아무런 글귀도 없는 카뮈의 묘. 마을 맞은 편 공동묘지에 있다. 그 왼쪽 옆에는 아내의 묘가 있다./사진=이서현
아무런 글귀도 없는 카뮈의 묘. 마을 맞은 편 공동묘지에 있다. 그 왼쪽 옆에는 아내의 묘가 있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을 뒤로 하고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길, 멀리선 마을이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뒤로는 울퉁불퉁한 백색 암반을 드러낸 뤼브롱산맥이 저와 함께 질주하고 있습니다. 참을 수 없어 샛길로 산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셔터를 눌렀을까, 산 속에 사는 노부부와 사나운 개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구름 한점 없었습니다. 이날도 석달 전의 그때처럼 사진 속에 남아 영원히 멈춰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프로방스의 색채다. 거친 담장에 누렇게 변색한 문틀과 거무튀튀한 여닫이문이 투명한 햇살 아래 조화를 이루고 있다./사진=이서현
이것이 바로 프로방스의 색채다. 거친 담장에 누렇게 변색한 문틀과 거무튀튀한 여닫이문이 투명한 햇살 아래 조화를 이루고 있다./사진=이서현

프로방스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좋아한다. 고흐도 이것에 반해 해바라기를 그렸는지 모른다./사진=이서현
프로방스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좋아한다. 고흐도 이것에 반해 해바라기를 그렸는지 모른다./사진=이서현

집시인지 집시 의상을 한 것인지 두 남녀가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낮의 정적과 나지막한 음악이 평화로운 조화를 이룬다./사진=이서현
집시인지 집시 의상을 한 것인지 두 남녀가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낮의 정적과 나지막한 음악이 평화로운 조화를 이룬다./사진=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