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대성당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 등, 이민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 등, 이민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대성당의 신축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명한다. 수차례에 걸쳐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도를 모집한 결과, 브라만테의 설계도가 채택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설계도에 따르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판테온(Panteon)의 돔 형식을 도입하고 있으며, 성전 구조는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초석이 놓이면서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후 4년간은 4개의 거대한 주 기둥을 받쳐 줄 받침대를 세우는 데 모두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브라만테는 성당 내부에 세울 주 기둥들의 모델을 판테온의 내부에 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참조하여 설계하였다. 특별히 성당 내부 벽의 기둥 형태는 우아한 도리스식으로 설계함으로써, 단순하고도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 등, 이민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대성당의 신축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명한다. 수차례에 걸쳐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도를 모집한 결과, 브라만테의 설계도가 채택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설계도에 따르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판테온(Panteon)의 돔 형식을 도입하고 있으며, 성전 구조는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초석이 놓이면서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후 4년간은 4개의 거대한 주 기둥을 받쳐 줄 받침대를 세우는 데 모두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브라만테는 성당 내부에 세울 주 기둥들의 모델을 판테온의 내부에 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참조하여 설계하였다. 특별히 성당 내부 벽의 기둥 형태는 우아한 도리스식으로 설계함으로써, 단순하고도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설계는 후에 미켈란젤로가 다시 도입하며, 현재의 대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한 왼쪽 윗부분은 첫 번째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의 설계 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514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새 교황 레오 10세는 브라만테가 죽기 바로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천거한 라파엘로를 대성당 신축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아직 건축 설계의 경험이 적을뿐더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보완책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나이가 많은 두 건축 설계자를 파견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였다. 교황은 새로이 구성된 새 성당 건축 책임자인 세 사람에게 앞으로 신축될 대성당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가능한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서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 등, 이민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 등, 이민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했다. 이 설계는 후에 미켈란젤로가 다시 도입하며, 현재의 대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한 왼쪽 윗부분은 첫 번째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의 설계 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514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새 교황 레오 10세는 브라만테가 죽기 바로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천거한 라파엘로를 대성당 신축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아직 건축 설계의 경험이 적을뿐더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보완책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나이가 많은 두 건축 설계자를 파견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였다. 교황은 새로이 구성된 새 성당 건축 책임자인 세 사람에게 앞으로 신축될 대성당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가능한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서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되었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대성당의 신축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명한다. 수차례에 걸쳐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도를 모집한 결과, 브라만테의 설계도가 채택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설계도에 따르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판테온(Panteon)의 돔 형식을 도입하고 있으며, 성전 구조는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초석이 놓이면서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후 4년간은 4개의 거대한 주 기둥을 받쳐 줄 받침대를 세우는 데 모두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브라만테는 성당 내부에 세울 주 기둥들의 모델을 판테온의 내부에 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참조하여 설계하였다. 특별히 성당 내부 벽의 기둥 형태는 우아한 도리스식으로 설계함으로써, 단순하고도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설계는 후에 미켈란젤로가 다시 도입하며, 현재의 대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한 왼쪽 윗부분은 첫 번째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의 설계 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514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새 교황 레오 10세는 브라만테가 죽기 바로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천거한 라파엘로를 대성당 신축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아직 건축 설계의 경험이 적을뿐더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보완책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나이가 많은 두 건축 설계자를 파견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였다. 교황은 새로이 구성된 새 성당 건축 책임자인 세 사람에게 앞으로 신축될 대성당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가능한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서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브라만테가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설계했던 성당을 다시 원래의 모습인 라틴형 십자가형태로 바꾸고, 돔의 위치도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세우도록 설계를 수정했다. 바로 이 시기에 커다란 두 사건으로 인하여 성당공사는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주교좌 성당문에 95개의 조문을 내걸고 로마 교황의 교도권에 항의했던 일과, 두 번째는 1527년 란치케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의 로마 침입으로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가 많은 피해를 입은 일이다. 그 후 1534년, 바오로 3세가 교황에 즉위하면서 공사를 재개(再開)하였다. 상갈로의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조수로는 야고보 멜레기노가 임명되었다. 1538년까지는 대성당을 받쳐줄 벽면 기둥들을 세우는 데만 주력하였다. 공사는 계속 활발히 진행되었고 1546년 8월3일, 공사 감독인 안토니오가 죽기 전까지는 눈에 뛸 정도로 공정이 진척되어 있었다.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로 임명된 이가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일흔한 살로 고향인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사해 살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이탈리아 전체에 나 있었고, 교황 바오로 3세는 그를 공사 총감독으로 임명하면서 '신이 보내 준 사람'이라고까지 격찬하였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임자였던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나무로 만들어 놓은 돔의 조형과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설계도를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임자 안토니오의 모든 설계를 비판하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설계대로라면 불필요한 내부, 외부 기둥이 너무 많고, 건축에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그의 설계대로 공사를 계속할 경우엔 앞으로 50년 이상은 더 걸려야 했으며, 공사 비용 역시 엄청나게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미켈란젤로는 자기 자신의 이상대로 설계하게 된다. 그의 설계에 따르면 대성당의 규모가 다시 축소되고, 돔을 중심으로 한 부분에서는 브라만테의 설계도로 되돌아가 대성당의 돔은 나무로 그 모형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토니오의 설계에 따라 이미 건축된 건물의 3분의 2에 가까운 부분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데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교황 바오로 3세의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그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게 된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서거로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된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에 의해 곤경에 처하게 되나, 새 교황 줄리오3세가 전임 교황의 신축 대공사에 관한 특별 담화문을 재확인하는 배려로,그의 남은 여생을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공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어쨌든, 미켈란젤로의 건축 설계도는 브라만테의 설계, 즉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와 아주 가깝게 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성당 건축물 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돔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해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과 1561년 사이에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1564년 2월, 아흔이 다 된 노장 미켈란젤로가 운명하기 직전, 탐부로는 완성되었으며 이제는 그 위에 이미 설계를 마치고 모형까지 만들어 놓았던 돔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미켈란젤로의 사후(死後), 이 역사적인 대공사는 잠시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85년, 훗날 역사가들에게 도시 계획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교황 식스투스 5세(1585-1590)가 즉위하면서 공사는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어 갔다. 미켈란젤로의 후계자였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그의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의 지휘 감독 아래, 600여 명의 인부들이 밤낮으로 공사를 계속한 결과, 1588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지 22개월 만인 1590년 6월, 이 거대한 돔은 완공되었다. 공사의 지휘 감독이었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설계 모형 그대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다만 그 높이를 몇 미터 정도 더 높게 수정하였다.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가 새 교황에 오르면서 대성당의 역사는 또 한 번 바뀌게 된다. 교황 바오로 5세는 이전의 교황 레오 10세가 원했던 것처럼 새로 짓는 대성당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이 위치해 있던 전 지역을 포괄하여 신축되기를 원했으며, 이에 따라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설계도를 다시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원래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한 성당 크기보다 두 배 정도 더 크게 확장하도록 결정하였고, 1606년 3월 29일 수요일, 이와 같은 결정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성당의 골격들은 모두 헐리고 만다. 그리하여 대성당의 모습은 다시 라틴형 십자가의 모양으로 변화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확장을 위한 새로운 설계도는 카를로 마데르노의 것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확장 공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새로운 설계도에 대한 많은 비판이 주변에서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설계자 마데르노에 의해 1607년 11월 5일 시공되었고, 1608년 2월 10일에는 대성당의 정면에 사용될 초석이 축성되었으며, 1614년에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이 완공되었다. 이렇듯 과감하게 확장된 부분의 내부 설계에서, 마데르노는 전임자 미켈란젤로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설계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미켈란젤로의 풍으로 설계했다. 그 결과, 현재의 대성당에 들어가 보면 어느 한 구석도 조화를 이루지 않은 부분이 없으며, 한 사람의 설계로 이루어진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이 사실이다. 1629년, 카를로 마데르노가 죽자 그 뒤를 바로크 예술의 대가 잔 로렌조 베르니니가 이으면서, 신축 대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베르니니가 해야 될 일은 전임자들의 설계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대성당의 내부를 좀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즉 전임자들, 돔을 중심으로 한 미켈란젤로의 설계와 마데르노의 확장된 설계를 가지고 어떻게 잘 조화시키면서 내부 장식을 하느냐에 그 중심 문제가 달려 있었다. 시대적으로는 이미 바로크 양식이 절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 데 반해, 대성당의 거의 대부분은 브라만테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이 두 양식을 조화시키면서도 접목시키는 일이 매우 어양식이 절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 데 반해, 대성당의 거의 대부분은 브라만테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이 두 양식을 조화시키면서도 접목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였다고 훗날 베르니니는 그의 전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대성당 내부에서 잘 볼 수 있는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세운 4개의 청동 기둥과 그 천정 덮개,그리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의 중심이 바로 제대 밑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돔의 중심에 일직선으로 이어지도록 고안한 점, 또한 십자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점은 베르니니의 위대한 예술적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대성당의 중앙 통로와 그 바닥은 모두 대리석을 사용했고, 대성당 내부의 양쪽 통로들 사이에 마련된 소제대들의 장식은 붉은색이 드러나는 천연 대리석을 사용하는 등, 현재 우리가 대성당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대부분의 것들이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많은 년 만인 1625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새롭게 축성된 것이다. 그러니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1506년에 시공한지 꼭 120년 만에 축성하게 된 셈이다. 1656년에서 1667년까지 대성당 정면에 자리한 거대한 규모의 광장 역시 베르니니가 구상하고 완공하게 된다. 그 이 광장을 구상할 때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광장의 양 옆에 있는 같은 모양의 타원형 회랑은 그리스도가 팔을 벌려서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감싸 안아 주는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해 설계했다.
작품을 남겼다. 1642년부터는 그의 전임자 마데르노에 의해 완공되었던 성당의 거대한 정면이 본체가 되는 대성당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이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정면 양쪽에 새로운 종탑을 세우면서, 전체적인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진 대성당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처음으로 성당(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을 세우고 축성한지 13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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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0) | 201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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