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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00년전의 한국과 일본인

"100년 전 한국인은 명석하고 당당했다는 외국인 기록 많아"


"100년 전 한국인은 명석하고 당당했다는 외국인 기록 많아"

[중앙일보] 입력 2013.08.10 00:10 / 수정 2013.08.10 00:18

우리가 몰랐던 한국인의 매력 : 유진룡 장관 - 이숲 작가 대담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과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의 저자인 이숲 작가. ‘한국인의 문화적 DNA와 한류’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내가 양반을 방문했을 적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을 먹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 많은 남자들은 감각적인 쾌락에 빠져 말년에는 완전히 파멸하게 된다. 과음이 조선에서는 일종의 국민적 습관이며 과식이나 음주 및 다른 악습은 귀족들도 그다지 예외가 아니다.”(아널드 새비지 랜도어:1865∼1924. 영국 화가·탐험가·작가. 1890년 이래 두 차례 한국 방문. 저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한국인들은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다. …그들의 몸놀림은 일본인의 특징인 벌벌 기는 비굴함과 과장된 예의 차리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아손 그렙스트:1875∼1920. 스웨덴 신문기자. 1904∼1905년 한국 방문. 저서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한국인에 대한 푸른 눈 외국인들의 평가다. 언뜻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이 같은 상반된 평가는 그로부터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얼마나 유효할까.


영국 작가 아널드 새비지 랜도어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우리 역사책들을 보면 대개 이 시기는 간략히 처리하고 넘어가곤 한다. 조선의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변화하는 시기였지만 결국 얼마 안 가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당시 외국인들이 남긴 한국인에 대한 기록 중에서도 유독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묘사해 놓은 부분에 주목하는 경향이 짙다. 예컨대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만 해도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인물로서, 한국인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저서에 남겼지만 우리의 시선에 잡히는 것은 주로 한국인의 단점이었다.

 이숲 작가가 지난 5월 말 출간한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예옥출판사)은 그 같은 비대칭성에 착안했다. 구한말 외국인의 한국인에 관한 기록을 추적하면서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의 긍정적인 면에 주목했다. 그러자 한국인이 새롭게 다가온다. 40대 후반인 작가가 20대 젊은 시절엔 생각하지 못했던 일종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작가와 출판사는 지난해 중순 이 책의 가제본을 만들어 각계 인사에게 보내 조언을 구했다.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이 된 유진룡 당시 가톨릭대 한류대학원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생면부지의 작가가 보낸 e메일이었지만 한류에 꽂혀 있던 그는 한류의 원동력을 떠올렸다.

 현직 문체부 장관과 작가의 이례적인 만남은 그런 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한국인의 문화적 DNA와 한류’라는 주제 아래 7월 22일 문체부 장관 접견실에서 대담이 열렸다.

 작가는 한국인의 긍정적 속성으로 ‘자연스러움’ ‘선함’ ‘강함’ 등이 공통적으로 거론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이날 대담을 풀어가는 실마리였다. 유 장관은 “100년 전 외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묘사가 모두 우리의 모습이겠지만 그중 어느 것을 더 키워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낀 대한제국의 운명을 풍자한 삽화. 1905년 미국 잡지 ‘하퍼스 위클리’에 실렸다.
 - 유 장관은 이 책의 어떤 점에 끌렸나.

 유진룡(이하 유)=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엽전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한국인은 어쩔 수 없어’라고 스스로 비하하는 건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상했다. 오히려 나는 오랫동안 문화 쪽에서 일하면서 한국인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 표현이나 증거는 찾기 어려웠다. 이 책이 그걸 말해 주고 있다.

 - 책 제목의 ‘내한민국’은 ‘대한민국’을 잘못 인쇄한 줄 알았다.

 이숲(이하 이)=가제본 제목은 ‘과대평가된 일본, 과소평가된 한국’이었는데, 조금 더 부드럽게 가자는 조언을 받아들였다. 내 소중한 나라라는 의미를 제목에 담았다. 책을 구상한 것은 40세 넘어 스웨덴 웁살라대에 유학을 간 이후다. 20대이던 80년대에는 못했던 생각이다.

 -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을 못한 망국의 백성에게서 어떤 점이 긍정적으로 보였을까.


 이=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은 군사나 경제 면에서 힘이 없는 나라였다. 그 시절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한국인에 대해 남긴 기록은 대개 게으르고 미개하고 겁이 많고 그런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웁살라대 도서관에서 당시 기록들을 보다가 전혀 다른 내용을 발견했다. 일도 잘하고, 명석하고, 호탕하고, 용감하고 그런 한국인에 대한 묘사다. 고위 정치인들은 부패해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됐지만 국민은 기회가 주어지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록도 보였다.

 유=내가 장관으로 오기 전 우리 사회의 큰 문제라고 느낀 게 있었다. 반목·갈등·시기와 자조(自嘲·자기를 비웃음)가 너무 심한 것인데, 이러다가 한국 사회가 유지 가능하겠느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100여 년전 한국인의 모습을 새롭게 떠올리면서 나는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가진 희망의 힘, 자부심의 힘이 훨씬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폄하는 구한말에만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이=한반도는 상처가 많은 나라다. 그것을 치유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치유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잠재력과 장점에 대한 애정. 잘못한 것을 다 덮자는 것은 아니다. 비판하되 매력에 대해서는 사랑해 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정신적인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 같다.

 유=작가가 지적한 ‘제국주의 음모론’에 공감했다. 우리나라를 열강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너희는 열등하다’는 무의식을 심어 놓았다. 무의식 중에 각인된 패배의식과 자기비하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숲 작가가 애정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내 식으로 말하면 자긍·자애다. 대한민국을 키운 것은 우리의 정신력이다. 우리나라가 뭐가 더 있는가. 자연자원도 적고 땅덩어리도 작다. 지난 100여 년간 정신력 하나로 버텨 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정신력을 잃어버리고 자꾸 물질적인 것만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바뀌는 듯해 안타깝다.

 - 문체부 장관의 어떤 역할을 찾은 듯하다.

 유=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박근혜 대통령이 문체부 장관 자리를 제안했다. 박 대통령이 내세운 문화 융성의 과제는 단지 예술 진흥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기반을 다져가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인 기반이란 우리 국민이 공유해야 할 문화적 가치다. 그것은 정부가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지 함께 의논하고 합의해 목표로 삼자는 것이 문화 융성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의 정신적 가치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유=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무시했던 우리의 긍정적 모습을 이 책이 환기시켜 준 거다. 그것을 참고 삼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 100년 전 한국인의 장점으로 ‘잘생겼다’든가 ‘자연스러움(naturalness)’ 같은 것이 거론된다. 일본인에 대한 근면·검약·예의 등의 표현에 비해 한국인에 대한 묘사가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이=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들은 대개 일본과 중국도 다 경험한 사람이다. 비교가 가능한 것이다. 일본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인에게서 뚜렷한 차이를 발견했던 것 아닐까. 예컨대 일본인의 예의가 과장됐다고 보는 것이다. 굽실거리거나 비굴함과도 연결된다. 한반도에 와 보니 일본인의 모습과 달랐던 것이다. 근대화도 안 되고 못살았을 텐데 문명인을 보고도 어딘가 여유가 있고 자연스럽다고 느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당하기까지 했다. 한국인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나도 잘 몰랐다. 미국에 몇십 년간 산 교포가 공감을 표한 적이 있다. 한국 교포들이 다른 동양인과 다른 점으로 자연스러움을 꼽겠다는 얘기였다.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 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선함과 강인함을 예로 들며 ‘착한 강인함’을 한국인의 정신적 특성이라고 했는데, 이 표현도 좀 막연해 보인다.

 이=한국인이 게으르다는 기록도 있지만 또 다른 기록에선 일을 시켜 보니까 일본인보다 더 빨리 습득한다든지, 일본인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든지 하는 기록이 있다. 또 한국인은 겁이 많아 자기를 지킬 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선 신미양요·병인양요를 예로 들면서 군사력이 우월한 외국을 맨손으로 물리친 사람들이 겁이 많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한다. 한국인은 싸울 만한 이유가 없으면 싸우지 않는데, 억압이 닥치면 무섭게 들고 일어선다고 했다. 이런 얘기가 한두 명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 고대의 기록에도 비슷한 얘기가 전해진다. 한반도 사람들은 강하고 용감한데 성품이 신중하고 소박해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적인 유전자가 오랜 기간 쭉 내려온 거라는 생각이 든다.

 - 유 장관이 보는 한류의 원동력은.

 유=K팝과 같은 대중문화 현상만 한류가 아니다. 한국 사람의 고유한 정신적 가치에서 비롯된 어떤 힘이 근원적으로 퍼져 나가는 현상으로 보고 싶다. 가령 싸이의 말춤 같은 게 노래와 동작만이 인기를 끈 게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신명과 자신감이 인기를 끄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논다, 같이 놀자 이런 식이다. K팝의 인기가 일시적으로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은 크게 걱정할 바가 아니다. 한류의 핵심이 우리의 정신력이란 점을 이해한다면 한류는 오래갈 것이다.

 - 이숲 작가는 한때 한류에 반감을 가졌다고 했는데.

 이=우리 문화에 어떤 매력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문화에 스며들 텐데 국가가 나서서 의도적으로 확산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오해였다. 유럽과 남미에서 플래시몹을 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국가가 나선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유=정부가 너무 나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 100년 전 한국인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묘사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우리 모습일까.

 유=두 가지 다 우리의 모습이다. 부정과 긍정 중 어느 것을 더 키워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역사인식이나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이=어느 나라나 부정·긍정의 면이 있다. 구한말 한국은 개항을 늦게 해 세계 흐름에 빨리 적응하지 못했다.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인과 일을 해보니 비범하고 심지어 잠재력이 무섭다는 식으로 이해가 바뀌었다. 패망해 가는 나라에서 이런 걸 느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식민지가 되는 바람에 한국은 잠재력을 맘껏 펼칠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긍정의 힘을 더 키우면 한국의 매력은 무궁무진할 거라고 믿는다.

배영대·이상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