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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7.05 13:45
아이돌 인기 팬투표를 '총선거'라 부르고… 공중파는 생중계, 시청률 20%로 1위
공짜는 없지만 - CD 한 장 사면 투표권 1장…
많이 살 수록 투표권 많아… 총 투표수 264만6847표… 홋카이도 도지사 선거 맞먹어
선택의 즐거움 주고 - 무엇 하나 뜻대로 하기 힘든
일본 젊은 세대에게 '만나고 변화시킬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콘셉트 통해
충성 고객과 소통·함께 성장 - 멤버와 팬 사이 연대감… 희망과
불안감마저 공유… 서로 파트너로 인식
지난달 8일 저녁 일본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 2002년 한·일 월드컵 결승전이 열렸던 7만석짜리 초대형 공간은 '총선거(總選擧)' 결과를 보기 위해 모인 인파로 넘쳐 났다. 이윽고 무대 중앙에 조명이 켜지고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온다. 무대에 마련된 수백개 의자에는 이날 선거의 후보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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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an-i.com
자민당의 참의원 압승을 축하하는 잔치라도 벌이는 걸까? 참의원 선거는 아직 보름이나 남았다. 게다가 자민당 당원들로 7만석짜리 초대형
스타디움을 채운다는 것은 우익 열기가 강하다는 일본에서도 불가능한 일. 이날 총선거는 일본 최고의 아이돌그룹 'AKB48' 멤버들을 대상으로
32번째 싱글 곡을 누가 주연으로 노래할지 정하는 이벤트였다. 일본 경제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 최신호는 "올해 '총선거' 투표수는
264만6847표에 달했는데, 2011년 홋카이도 도지사 선거의 총 투표수에 맞먹는 규모"라고 전했다.
총선거 발표의 전 과정은
공중파 채널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으며, 평균 시청률 20.3%로 이날의 모든 TV 프로그램 중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도쿄
시내의 술집과 음식점에는 'AKB48 총선거 생중계 중'이라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나붙었다. 도쿄에 거주하는 오카야마 나오(22·호세이대 4)씨는
"지금 일본에서 '총선거'라는 단어는 AKB48의 인기 순위를 매기기 위한 팬 투표와 동의어로 통한다"고 전했다.
AKB48의
노래와 춤은 최상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K팝 아이돌에 익숙한 한국인 눈엔 어설픈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총선거 이벤트로 대변되는
AKB48의 마케팅 전략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시사점이 적지 않다.
AKB48 총선거 이벤트는 충성 고객 기반 관계 마케팅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비자가 상품 전략 자체에 관여하고, 그들의 취향에 따라 민주적인 절차로 상품을 교체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오타 쇼이치씨는
"총선거를 통해 AKB48의 멤버와 특정 멤버를 좋아하는 팬 사이에 연대감이 만들어지며, 팬들은 멤버의 희망과 불안까지 공유하는 파트너적인
존재가 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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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B48 멤버들이 지난달 8일 도쿄 인근의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에서 열린‘2013년 AKB48 총선거’순위 발표에 앞서 공연하고 있다. 이 행사에는 팬 7만명이 모였다. 총 투표 수는 265만표. 공중파 TV에 생중계됐고,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 AFP
충성 고객 기반 관계 마케팅의 진수
뭔가 선택한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특히 현실 세계에서 무엇 하나 뜻대로
하기 어려운 일본 젊은 세대들에게 '내가 직접 만나고 또 변화시킬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콘셉트가 먹혀들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공짜는 없다. 총선거에 투표하려면 투표권 한 장이 첨부돼 있는 1500엔(1만7000원)짜리 CD를 사야 한다. 또 1인 1표가 아니라, CD를
많이 사면 살수록 그만큼 투표권이 더 주어지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가 작용한다. 이 때문에 일부 팬은 자신이 좋아하는 맴버가 뽑히도록 같은 CD를
수백만엔어치씩 사는 경우도 있다.
CD를 사면 또 AKB48이 수시로 진행하는 '악수회'에서 멤버와 악수를 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어떤 경우엔 악수회 참가 멤버 전원과 악수할 수 있고, 다른 경우엔 고객이 지명한 멤버 1명과 악수할 수
있다.
'AKB48의 경제학'이란 책을 쓴 다나카 히데토시 조부(上武) 대학 교수는 "AKB48은 불황과 취직난 속에서도 젊은이들이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디플레 컬처(불황형 문화)에 완벽하게 적응했기 때문에 인기가 오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AKB48은 당초 48명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고정 멤버에 상비군까지 합쳐 총 250명에 달한다. 이 중 누가 고정
멤버가 되고 누가 가운데서 노래 부를지를 초창기에는 제작사가 임의로 정했다. 그러나 인기 순위를 매겨 공정하게 자리를 배치하라는 팬들의 요구가
반영돼 2009년부터 총선거가 시작됐다. 총선거는 AKB48과 이해관계가 없는 제3의 IT 회사를 통해 전자투표로 진행된다. 총선거에서 1위를
하면 각종 무대에 출연할 때 한가운데서 노래할 수 있으며 싱글 곡 취입이나 방송 출연 기회도 우선적으로 준다.
고객과 함께 성장한다
AKB48은 2005년 12월 도쿄 아키하바라의 한 작은 극장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다. 콘셉트는 '매일 같은 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아이돌그룹'이었다. AKB는 아키하바라의 줄임말인 '아키바'의 영어 이니셜에서 따왔다.
이들은 TV에서만 볼 수 있는, 멀리 있는
스타가 아니라,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녀들의 이미지로 팬들에게 다가갔다. 즉 '소녀시대'처럼 데뷔 때부터 뛰어난 완성도와 퍼포먼스를
무기로 곧바로 중원(中原)을 공략하는 대신, '오타쿠의 성지(聖地)'인 아키하바라라는 한정된 지역의 한정된 계층을 공략, 그 팬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전략을 택했다.
이렇게 '미완성의 아이돌이 팬들과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콘셉트를 통해 인기의 선도(鮮度)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초기엔 몇 년 못 갈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AKB48은 올 상반기 일본
싱글차트에서 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상반기 1·2위를 석권했고, 올 상반기 싱글 판매량만 300만장, 데뷔 이후 누적 판매는 2200만장에
달한다. 올해로 5회째인 총선거는 작년까지 1만5000석 규모의 도쿄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렸지만, 몰려드는 팬을 감당 못 해 올해는 수 용
인원이 부도칸의 5배인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으로 옮겼다.
AKB48은 지갑은 얇아지고 좌절은 커진 일본의 젊은 세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20대를 맞은 40대 남성들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었다. 일본 대중가수 공연의 입장료는 1만엔(약 12만원) 수준으로 돈 없는
젊은 세대가 자주 즐기기 어려웠다. AKB48은 입장료를 기존의 3분의 1로 크게 낮췄다.
지산지소(地産地消):생태계의 확장
AKB48의 소속사인 AKS는 AKB48의 콘셉트를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 일종의
자매 AKB48을 여럿 만들었다. 오사카 난바를 거점으로 한 NMB48, 나고야의 SKE48, 후쿠오카의 HKT48,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JKT48, 중국 상하이의 SNH48이 그것이다. 동네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아이돌그룹이 되려면 도쿄 이외 지역에 사는 팬들을 위한 별도 그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AKB48의 상비군 역할을 함께 맡는다. 인기를 얻으면 총선거를 통해 단번에 AKB48의 중앙 무대에 설
수 있다. 지역의 팬들은 마치 지역 연고 프로스포츠팀을 응원하는 것처럼 자기가 후원하는 멤버의 성장을 계속 지켜볼 수 있다. 이번 총선거 1위는
HKT48 출신이 뽑히는 이변을 연출했다.
AKB48은 비즈니스 생태계의 자연발생적인 확산이란 측면에서도 기업에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다. 한두 명의 스타 파워에 의존하는 대신 팬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아이돌그룹이라는 콘셉트 하나로 계속 저변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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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모토 야스시(秋元康)
◆ 'AKB48' 만든일본 연예계미다스 손
AKB48을 만든 인물은 일본 '연예계의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아키모토 야스시(秋元康·55·사진) 아키모토사무소 대표다.
그는 17세 때 라디오 방송 작가로 데뷔했으며, TV 드라마와 연예 프로그램 작가, 노래 작사가, 영화 원작·기획자 등으로 40년 가까이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일본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의 대표곡인 '강물이 흘러가듯(川の流れのように)' 등 총 4000곡의 가사를
썼으며, AKB48 관련 곡만 700곡 이상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