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4.3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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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논설위원
삼성그룹이 최근
사내 인터넷 통신망에 '삼성, 이스라엘에 창의성을 묻다'는 제목의 시리즈를 올렸다. 벤처 강국 이스라엘에서 삼성의 미래 전략 아이디어를 구하는
기획이다. 전경련도 이스라엘에 탐방단을 보내는 등 올 들어 우리 사회에서 '이스라엘 배우기'가 유행이다. '창조경제 전도사'로 불리는 윤종록
미래창조과학부 2차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의 혁신 사례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인구 760만명의 작은 나라이지만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대국(大國)이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중요한 하이테크 센터"라고 했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반도체칩, 플래시 메모리, 컴퓨터 방화벽, 디지털 인쇄 기술,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 기술 같은 혁신적 제품과 기술이 이스라엘에서 나왔다.
이스라엘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율 4.5%, 국민 1인당 벤처 투자액 170달러, 국민 1만명당 연구개발 인력 140명으로 모두 세계 1위다. 벤처 창업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나라이기도 하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인텔·시스코 등 200여개에 이르는 해외 대기업이 이스라엘에 연구개발 센터를 두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스라엘이 과연 창조경제의 모델일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 개발된 혁신적 기술은 많지만 그 기술을 이용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거의 없다. CPU칩은 인텔, 휴대전화는 모토롤라, 디지털 인쇄는 휼렛패커드 등 이스라엘 기술로 세계시장을 주도해온 기업은 대부분 외국 기업이다. 이스라엘에서 고용을 가장 많이 하는 민간 기업도 인텔이다.
창업 자금을 대주는 소액 엔젤투자는 활발한 반면 기업 성장에 필요한 투자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벤처기업인들도 기업을 키우는 데 관심이 없다. 이들의 목표는 대부분 신기술을 개발한 뒤 곧바로 회사를 외국 기업에 팔아 목돈을 거머쥐는 것이다. 성공한 벤처기업의 80%가 외국 기업에 인수된다. "이스라엘의 기술 개발은 미국·유럽 기업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정도다. 최근엔 중국 기업들도 이스라엘 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다.
요즘엔 벤처기업들이 장기적인 사업 구상과 비전 없이 기술 개발만 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혁신적인 기술이 관련 산업 육성과 고용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경제의 아킬레스건(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벤처기업의 '성장 기피증'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를 떠돌며 숱한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의 역사에서 비롯된 문제여서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창업을 활성화하는 것보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워내는 게 더 중요하다. 성장하는 기업만이 안정적이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 경제 역시 중소기업이 중견 기업으로, 중견 기업이 대기업으로 커나가는 성장 경로가 막혀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국에는 이스라엘에 없는 세계적 대기업이 여럿 있다. 생산·조직·인력 관리와 글로벌 마케팅 등 기업을 키우는 데 필요한 노하우도 훨씬 풍부하게 쌓았다.
이스라엘에서 배울 건 배우더라도 먼저 그 강점과 약점, 현상과 이면(裏面)을 제대로 봐야 한다. 이스라엘 경제의 화려한 겉모습만 보다가는 잘못된 처방으로 오히려 화(禍)만 부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