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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대한민국史'와 국사편찬委의 착각

[태평로] '대한민국史'와 국사편찬委의 착각

  • 김태익 논설위원

    입력 : 2013.02.18 23:38

    1988년 졸속 출간 대한민국 正史… 국편, 느닷없이 새 책 편찬 계획
    구성원 공감도 일정한 방향도 없어 논란 끝에 편찬 작업 중단하기로…
    꼭 국사학계만 할 수 있는 일인가… 각 분야 학자들이 머리 맞대야

    [참조] 일본은 초등학교 교과서 한권 집필하는 분들이 전문분야 박사,

    교수,초,줄,고교사,음악,미술,체육전문인이 100명 이상이 참여 편찬,

    [한국] 역사 교과서 한명이 집필 수정도 본인만 가능, 좌파가 쓰면

    역사도 외곡?

    김태익 논설위원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한민국사(史)'를 편찬한 적이 있다. 1988년 노태우 정권 초기 일이다. "국편(國編)이 건국 40년 만에 내놓은 최초의 '대한민국 정사(正史)'"라고 스스로 자랑이 대단했다. 국편위원장이 편찬위원장을 맡고 "각 분야 가장 권위 있는 학자 9명으로 필진을 구성했다"고 했으니 모양도 그런대로 갖춘 셈이었다. 신국판, 783쪽의 두툼한 분량이었다.

    그러나 국편 '대한민국사'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그것이 나왔다는 걸 알리는 신문 기사로 끝이었다. 그 전해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학가 과격 시위 배경에는 학생들의 대한민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받아 국편이 1년 3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낸 게 '대한민국사'였다. 그러니 필자 간에 대한민국사를 보는 사관(史觀)이나 집필 원칙을 논의할 여유조차 있었을 리 없다. 같은 책에서 5·16을 어떤 필자는 '혁명'이라 했고, 어떤 필자는 '쿠데타'라고 했다. 1980년 공직자 숙정을 누구는 '선별 기준이 애매했다'고 썼고, 누구는 '깨끗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했다.

    당시는 '한국은 미국의 신(新)식민지'라는 주장부터 6·25 북침설에 이르기까지 온갖 좌파 사관이 꿈틀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이에 맞서는 제대로 된 '대한민국사' 한 권은 꼭 필요했다. 그러나 권력의 주문에 맞추기 위해 조급히 서두른 역사서 편찬은 부실 공사와 같았고, 그 결과 국편 '대한민국사'는 바로 국민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좌파사관은 더욱 창궐했다.

    25년 전 얘기를 새삼 떠올리는 것은 연초 불거져나온 국편의 새로운 '대한민국사' 편찬 방침과 관련한 논란 때문이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1월 한 신문 인터뷰에서 느닷없이 "전체 10권 분량의 '대한민국사' 편찬 작업을 하고 있으며 올해 안에 첫 권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도 국편은 "정부 수립 65년 만에 처음 펴내는 '대한민국 정사'"라고 자랑했다.

    민간 회사의 사사(社史), 지방 도시의 시사(市史)를 쓰는 데도 편찬 방향에 대한 구성원들의 공감이 있어야 하고 가장 적합한 필자를 찾는 절차가 필요한 법이다. 이 위원장의 발언이 있기 전까지 국편이 새로운 대한민국사를 쓰고 있다는 것은 국민은 물론 대다수 역사학자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 정부가 막 출범하려는 시점에 맞춰 국편이 대한민국사를 새로 쓰겠다고 나서는 의도가 뭐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몇몇 편찬위원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 반대에 앞장서거나 대한민국 건국을 헐뜯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던 점을 들어 국편 새 '대한민국사'의 집필 방향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논란 끝에 국편은 그동안 진행해온 새 '대한민국사' 편찬 작업을 중단키로 한 모양이다.

    국편이 새 '대한민국사' 편찬에 착수하고 이를 언론을 통해 밝히는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권력이 이행되는 시류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편이 이런 식으로 밀실에서 졸속으로 대한민국사를 편찬했다면 '정사'를 내놓기는커녕 25년 전의 잘못을 또 한 번 되풀이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사'를 편찬하는 일이 꼭 국편이나 국사학계만의 몫인가 하는 것이다. 또 그들은 이 일을 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국사학계가 민중·민족의 늪에 빠져 대한민국사를 편협하게 해석하고 있는 사이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등 다른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대한민국사의 진실에 가까운 업적을 많이 쌓아왔다.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높이를 갖춘 학자들이 학문의 벽을 넘어 충분한 시간 동안 머리를 맞대야 성숙하고 균형 잡힌 '대한민국사'도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