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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무등산 국립공원 승격! | 르포]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산세에 흠뻑 빠져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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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무등산 국립공원 승격! | 르포]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산세에 흠뻑 빠져들다
산장~규봉암~장불재~중봉~바람재~증심사 17km 코스 답사

▲ 천상(天上)의 석수가 만든 작품인가! 서석대는 기둥바위를 하얀 눈으로 덧칠한 채 돌병풍을 펼쳐놓고 있다.

지난 연말 무등산은 국립공원 승격 발표 이후 축제 분위기였다. 새해 첫날 열린 새해맞이 행사 때는 등산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합세해 무등산을 오른 사람이 1만2,000명에 이른 것으로 파악됐다. 그리고 새해 첫 토요일인 1월 5일 오후에도 증심사 일원은 등산객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왔다.


이튿날 일요일 아침에도 원효사 코스 들머리 주차장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등산객들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공원관리소를 지나 식당가로 들어서는 순간 조용해졌다. 주차장 일원에 모인 산행객 대부분은 서석대로 곧장 이어지는 옛길로 들어섰다.


“무등산을 찾는 등산객 중 우리가 걷는 꼬막재 코스를 타는 사람은 5%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길기 때문이죠. 그래도 무등산을 제대로 보려면 이 둘레길이 최고예요. 규봉암에 지공너덜도 보고 서석대도 오를 수 있거든요.”


사철 다른 풍광의 산수화 그리는 원효계곡


산행 안내를 맡은 무등산 해설사 최홍근(68·광주전남 山ROTC 산행대장)씨는 “무등산장 일원의 원효계곡은 계곡도 좋고 숲이 울창해 여름철에는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산허리를 따라 의병길이 나 있는 윤필봉은 광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가을철 단풍 명산”이라며 무등산의 자연에 대해 알려 준다.


예전 광주시민에게 신혼여행지로 각광 받던 숙소였다는 무등산장 자리에 위치한 숲문화학교를 지나면서 산길 주변은 숲이 울창해지고 한결 호젓해졌다.


“이게 우리 소나무예요, 토종이죠. 바람이 많이 불어 한쪽으로 살짝 누운 거예요. 겨울에는 꼬막재에서 바람이 내려 불고 여름엔 계곡을 따라 바람이 올려쳐요. 겨울에는 소복소복 쌓인 하얀 눈 무게에 견디지 못해 나뭇가지가 축 늘어지고요. 그렇게 원효계곡의 숲은 사철 다른 산수화를 그리고 있어요.”


▲ 숲 우거진 꼬막재 허리길.

지난해 마지막 날 내린 눈이 두텁게 덮인 산길은 때 묻지 않은 자연으로 들어서는 듯해 반갑다. 편백나무숲에 이어 수종이 다른 나무 두 그루가 딱 달라붙어 천생연분을 자랑하는 연리목을 지나자 꼬막재 고갯마루(관리소 2km, 규봉암 3.5km). 고개 형상이 꼬막을 닮았다 하여 혹은 꼬막처럼 생긴 자갈이 고갯마루 부근에 많아 꼬막재라 이름 지어졌다는 고개다.


“옛날에는 꼬막재에서 누에봉으로 곧장 오르거나 규봉암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군도로 개통 이후 폐쇄됐어요. 보부상들도 그 옛길을 이용했대요. 지난해인가 아는 분과 올라봤는데 산짐승이 나타나 깜짝 놀랐어요. 멧돼지와 고라니는 정말 많아요. 참, 광주 사람들은 북봉을 누에봉이라고 부르는거 아시죠?”


꼬막재 고갯마루 부근 샘을 지나자 산록은 더욱 자연미가 넘친다. 무등산장 일원은 소나무와 편백나무 그리고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반면 꼬막재 너머 무등산 동쪽 사면은 다양한 수종이 원시림처럼 우거져 있다.


“여기서 왼쪽 길로 내려가면 광일목장으로 가요. 도중에 왼쪽 길로 빠지면 선비바위고요. 선비바위는 워낙 각이 세서 실력이 어지간한 사람은 힘들어요. 새인봉과 함께 광주전남 암벽등반의 메카예요.”


▲ 1 꼬막재~규봉암 코스의 들머리인 원효사 버스종점. / 2 지명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서 있는 꼬막재.

꼬막재 약수를 지나 첫 번째 갈림목에 닿자 광주 산악인 박남수(48·몽벨 무등산점 대표)씨는 광일목장길과 선비바위의 위치를 알려 주며 “광주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산이고, 클라이머들에게는 히말라야를 향한 훈련장 같은 곳”이라 일러준다.


“자, 이제 담양에서 화순 땅으로 넘어갑니다. 저기 북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진 산줄기 보이죠. 호남정맥이에요. 저기 우뚝 솟은 산이 담양 추월산이고요. 모후산도 저기 보이네요. 지리산도 보이는데 오늘은 날씨가 덜 맑네요. 아~, 저기 반야봉이 보이네.”


북산(778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갈라지는 신선대 억새평전(신선대 1.3km, 규봉암 3.3km)에 이르자 최홍근씨는 “억새평전은 석양 무렵이나 억새가 한쪽으로 누울 때에 정말 매혹적인 풍광을 자아낸다”며 낙동정맥을 비롯해 호남 일원의 명산들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저기 정상 능선 보이죠? 원효사 쪽에서 보면 누에가 뽕잎 먹는 모습이라 하여 누에봉이라 부르는 봉우리예요.”


무등산은 인왕봉, 지왕봉, 천왕봉 세 봉우리가 정상부를 형성하고, 북으로 직선거리 약 1km 거리를 두고 북봉인 누에봉이 어깻죽지처럼 솟아 있다.


흰눈이 제법 두텁게 덮인 허리길을 따라 광일목장 갈림목을 지나고, 비 오는 날이면 장관을 이룬다는 시무지기폭포 갈림목을 지나 오르막길로 접어든지 얼마 되지 않아 기둥바위가 나타나고 돌병풍을 등진 규봉암(圭峯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 광석대를 비롯해 10여 개의 기둥바위가 절경을 이룬 규봉암. 조망도 뛰어난 신라 고찰이다.

규봉암은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순응대사(신라 애장왕, 800~809)가 중건했다고 전하며, 798년(신라 원성왕 14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순응대사가 절집다운 모습을 갖추고 창건했다는 신라고찰이다. 고려 때 왜병들의 침략을 물리친 격전지이기도 했다는 규봉암은 산사의 분위기도 일품이지만 암자를 둘러싼 광석대(廣石臺)를 비롯한 기암들이 더욱 인상적이다.


광석대를 비롯해 기둥바위 10개가 절경을 이룬 규봉


입석대(立石臺)·서석대(瑞石臺)와 함께 무등산 3대 석경(石景)으로 꼽히는 광석대는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1379-1463)가 “비단을 마름질하듯,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고 하고, 육당 최남선이 칭송한 바 있는 기둥바위다. 규봉암 일원은 광석대와 더불어 송하(送下), 풍혈(風穴), 장추(藏秋), 청학(靑鶴), 송광(松廣), 능엄(嚴), 법화(法華), 설법(說法), 은신(隱身) 등 십대(十臺)가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광석대 뒤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어요. 재작년에 고경명 선생의 <유서석록>에 나온 길 따라 올라가봤어요. 규봉암은 암자 터도 좋지만 해우소(解憂所) 자리는 정말 대단해요. 암자가 자리 잡은 뒤 한 번도 퍼낸 적이 없어요. 해우소 아래가 깊은 너덜을 이루고 있거든요.”


규봉암에서 10여 년간 머물렀다는 무등(無等) 스님은 일행을 방 안으로 초대해 차를 따라 주면서 “규봉암은 고려 말 이성계에게 패한 왜병들이 암자에서 목축을 쌓고 버티다가 13명이 사망했고, 6·25 전에는 빨치산들이 사령부로 이용하기도 했던 곳”이라고 알려 준다.


규봉암은 이런 험한 얘기가 상상되지 않을 만큼 예스럽고 아름다운 암자다. 스님들 또한 반겨줘 격 없는 ‘無等’의 암자다 싶다. 스님의 선방에서 녹차로 몸을 녹이고 공양간(주방)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규봉암 일주문 대신 기암 사이로 빠져나가 보조국사가 송광사 창건을 앞두고 좌선하던 곳이라는 보조석실로 다가선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석실 앞마당은 도인의 도량 자리 대신 등산객 부부의 점심 터요, 지공대사가 너덜 하나하나를 대중 삼아 설법했다는 지공너덜은 등산객들에게 조망처였다.


“무등산은 부처와 관계된 지명이 많아요. 저기 보이는 안양산은 극락을 일컫는 지명이에요. 그만큼 편안한 곳이란 의미겠지요.”


▲ 지공너덜에서 무등산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최홍근씨.

최홍근씨의 설명을 들으며 허리길을 따르다가 석굴암 샘에서 목을 축이고 피안교(彼岸橋)를 건넌 이후 장불재에서 규봉암으로 내려서는 등산객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러다 이서·영포(3.5km) 갈림목을 지나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치듯 불어대고 모자를 푹 눌러쓴 등산객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그 뒤로 장불재(長佛峙·900m)에는 등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고, 그 오른쪽 입석대를 거쳐 서석대로 이어지는 산길은 등산객들이 뱀꼬리 물듯 줄지어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난 한 해 탐방객이 700만 명에 육박했다는데 곧 1,000만 명을 돌파할 거예요. 저게 그 유명한 입석대고, 천왕봉 못미처 둔덕 아래에 서석대가 있어요. 하나하나 선돌, 입석이에요. 알고 계시죠? 선돌이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을 상징한다는 것을.”


고원을 연상케 할 만큼 널찍한 장불재는 긴 골짜기라는 장골(長谷) 위에 있다 하여 장골재라 불리다가 부근에 장불사(長佛寺)가 생기면서 장불치(長佛峙)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하는 고개다. 화순 이서와 동북 사람들이 광주로 가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였다는 장불재에서 미끄러운 눈길 따라 입석대로 다가서자 최흥근씨는 “해발 1,000m대에 주상절리대가 형성된 곳은 무등산밖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그래서 광주시에서 무등산을 유네스코에 세계지질공원으로 등록시키려 추진하고 있다”고 귀띔해 준다.


입석대 뒤편으로 돌아 올라서자 최홍근씨는 “제봉 고경명 선생의 <유서석록>에 의하면 입석대 기암 사이사이에 암자가 10여 개나 있었다”고 말하지만 기암 사이의 공간은 암자가 들어서기에는 너무 좁다. 암자 하나 하나가 수도승의 선방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양의 보은설화가 전하는 승천암(昇天岩)을 지나치자 서석대 정상과 그 뒤로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왕봉, 지왕봉, 천왕봉 3개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일원은 1965년 군사시설이 들어선 이후 접근이 금지돼 왔다. 그러다가 2008년 12월 20일 서석대가 개방된 데 이어 정상부가 2011년 5월 14일 이후 2011년 2회, 그리고 2012년 4회 개방됐다.


▲ 장불재에서 바라본 입석대. 등산객들이 꼬리를 물며 오르내리고 있다.

의병장 김덕령 장군 얘기 전하는 명소들 산재


“지왕봉은 비로봉이라고도 불려요. ‘비로’란 푸르다는 의미예요. 지왕봉에는 임진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과 얽힌 명소가 있어요. 일제 때 일본 장교가 김덕룡 장군의 얘기를 전해 듣고 ‘나도 해낼 수 있다’며 뛰었다가 추락사했다는 뜀바위도 그중 하나예요.”


서석대 뒤로 천왕봉으로 접근을 막기 위해 야트막한 방책이 설치돼 있지만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는다. 이미 일망무제의 조망이 발아래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동쪽과 남쪽은 화순 일원의 산봉들이 산그리메를 평화롭게 그려놓고, 서쪽으로는 무등산자락이 널찍한 평원에 자리 잡은 광주시가지를 감싸 안을 듯 꿈틀거리고 있다.


“충장로5가에서 천왕봉까지 직선거리가 9.2km밖에 안 돼요. 대도시를 낀 국립공원 중 가장 가까운 거리일 거예요. 저기 보세요, 능선들이 시내를 향해 뻗어나가잖아요.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감싸 안듯. 저런 산세 때문에도 ‘무등산은 광주’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지왕봉은 바위에 붙어 있는 금빛 이끼가 햇살에 반짝일 때 환상적이고, 서석대는 은빛 이끼가 석양을 받으면서 반짝일 때 절경을 이룬다는 얘기를 들으며 중봉으로 향하는 사이 서석대는 은빛 이끼 대신 은빛 고드름으로 반짝이고 있다.


▲ 산책로처럼 잘 닦인 삼밭실 탐승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삼을 심어놓고 높이 뛰기 훈련을 했다고 전하는 능선 안부다.

최홍근씨는 서석대 조망데크에 올라서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설화나 빙화가 피어 있을 때도 환상적이지만 진달래꽃이 만개할 때 절경을 이루는데 데크가 진달래밭 위에 설치된 것. 최씨는 서석대 정상에 등산객이 마구 올라 다니다 보면 그 무게에 눌려 서석대가 무너질 염려도 있다며 걱정스러워했다.


서석대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비포장도로로 내려서자 1965년 주둔 이후 33년간 존속돼 오다가 1998년 철거됐다는 군부대 자리는 억새밭으로 변해 있다. 이곳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석양 무렵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억새밭으로, 김덕령 장군이 삼을 심어놓고 높이뛰기 연습을 했다는 ‘삼밭실’이다.


“무등산은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이에요. 무등산 기슭 석저촌(현 충효동)에서 1567년 태어난 김덕령 장군은 뜀바위에서 담력을 키우고, 삼밭실에서 무예를 닦는가 하면 백마능선에서 흰 말을 타고 달리면서 기개를 키웠던 것으로 전해지는 의병장이에요. 간신의 모함으로 29세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지만 끝까지 꼿꼿함을 잃지 않았대요. 그래서 광주시민들은 충장공의 기개가 무등산에서 비롯됐고 그 정신이 광주의 정신이라 얘기하는 거예요.”


중봉에 올라서자 해가 서서히 내려앉으면서 기온이 뚝 떨어진다. 반면 용추계곡 아래 제2수원지는 햇살에 반짝이고 서석대는 얼굴을 붉히기 시작한다. 그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서석대에서 한품이재를 지나 인왕봉, 지왕봉, 천왕봉을 거쳐 누에봉으로 이어지는 정상 능선은 거대한 장성처럼 솟구치고 담양 땅의 산봉들은 덩실덩실 춤추는 형국이다. 박남수씨는 “눈 내린 다음날 아침이면 정상 능선 서쪽 사면은 거대한 눈꽃으로 변한다”고 귀띔해 준다.


▲ 해발 1,100m 높이의 서석대 정상에서 광주 등산인들과 취재팀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엉덩방아 찧는 횟수 늘어나는 데도 즐겁기만 해


중봉을 지나면서 방송중계탑이 눈에 거슬린다. 박남수씨는 “무등산이 국립공원다우려면 이곳에 있는 방송탑뿐만 아니라 장불재 남쪽의 방송탑과 기지국이 없어지거나 적어도 하나로 통합돼야 할 것”이라 강조한다.


밋밋한 까까머리 능선 길은 토끼등 갈림목에 다가서면서 소나무 우거진 산수화 풍의 능선으로 변한다. 예서 왼쪽 길을 따르면 동화사 터를 거쳐 토끼등(1km)으로 내려선다. 토끼등 갈림목을 지나자 산길은 급격히 떨어지고 늦재삼거리·동화사 터 갈림목을 지나자 곧 바람재(470m). 무등산도립공원관리소에서 시작된 허릿길 도로가 올라오는 곳이다.


“원래 중머리재를 거쳐 화순까지 이어지는 순환임도로 계획됐어요. 한데 산악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무등산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토끼등에서 멈춘 거예요. 길 내겠다고 올라온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운 사람도 많았대요.”


해질녘 내려선 바람재 임도는 인적이 뚝 끊기고 찬바람이 불어댄다. 바람이 좋은 고갯마루이기 때문인지 갈림목 한쪽에 청풍대(淸風臺)라 이름 지어진 쉼터가 조성돼 있다.


“배고파요! 빨리 증심사로 내려가서 보리밥 먹는 게 어때요?”


오후 5시, 일행은 무등산 별미 보리밥 생각에 하산을 서두른다. 덕산계곡 길은 오후 햇살에 눈이 녹으면서 질척인다. 골을 내려설수록 오히려 날씨가 차가워지고 다시 미끄러운 눈길이 나타나 엉덩방아를 찧곤 한다. 하지만 미끄러지는 횟수가 늘어나는 데도 마음이 즐겁다. 일행은 어머니 품같이 넉넉한 무등산 풍광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산행길잡이는 무등산 코스가이드 편 참조>


▲ 나무숲과 기암 숲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룬 서석대 능선,
▲ 중봉 하산길. 산릉은 산아래로 내려서면서 부드러운 동산으로 변해가고 그 안에 삶의 터전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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